[필자 소개] 도해정. 〈일다〉 독자위원회에 참여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있다. 모두가 ‘안전’하게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나를 가장 먼저 덮친 감정은 분노보다도 무력감이었다. 성범죄 사건은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었고,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기사에 이미 지쳐가고 있던 터였다. N번방이라는 큰 파장 이후에도 디지털 범죄의 공포심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의 수사기관, 미흡한 정부의 대처, 가해자에게 관대한 판결,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현실에 그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성범죄가 늘어날수록 여성들은 스스로에게 더 많은 제약을 걸게 된다. ‘버닝썬’ 사건 이후 여성들은 클럽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었고, ‘N번방’ 사건과 딥페이크(이미지/영상합성) 성폭력이 발생하자 SNS 사용에 제약이 생겼다.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 직후 모 학교에서는 강당으로 여학생을 불러 모아 ‘SNS를 조심하라’ 교육(이라기보단 억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범죄는 가해자의 고의에 의해서 발생한다. 범죄가 일어날 때 피해자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SNS에 얼굴이 드러난 사진 수십 장을 올려도, 가해자가 범죄를 행하지 않으면 범죄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간단한 사실을 간과한 채 사회는 아직도 여성들에게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행동거지’를 알려준다. 피해자는 사건 후 가해자에 대한 형사재판에서도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말이다.
내가 가장 무력감을 느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범죄는 정말 불의의 사고처럼, 나의 의지와 나의 행동과 상관없이 갑자기 일어나는데 세상은 계속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라고? 수없이 반복된 분노의 끝은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런데,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온라인 활동가를 보며, 문득 작년에 읽었던 ‘N번방’ 방청 연대기가 떠올랐다. 책꽂이의 칙칙한 전공 서적들 사이 오렌지색 커버가 눈에 띄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책을 집어 들었다.
‘팀 eNd’ 활동가들의 n번방 재판 방청기
2020년 초, 추적단 불꽃에 의해 드러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후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러 움직임이 일었다. N번방을 운영하고 성 착취물을 제작, 유포한 가해자뿐 아니라, 소지하거나 시청한 참가자들까지 처벌하길 바라는 청원, 디지털 성범죄에 관대한 판결하는 판사 교체 청원 등. 시민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 사건 해결을 위해, 유야무야 처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다른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시에 나도 청원에 참여하고, SNS를 활용해 알리고, 디지털 성범죄와 싸우는 활동가들을 응원했다.
그러나 재판이 길어지고 유사 사건이 반복될수록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형사재판이 개시되고 판결이 나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아야 4개월. N번방 사건의 주요 가해자인 조주빈(박사)은 1심 판결까지 8개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19개월이 걸렸다. 2020년 5월 검거되었던 문형욱(갓갓)도 2021년 11월이 되어서야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었다.
나와 내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선뜻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뜻이 같아 보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믿음이 생기면 그제야 조심스럽게 페미니스트임을 밝힐 뿐이다. 서로의 정체(?)가 확인되자마자 세상의 불합리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며 마음속 응어리를 해소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가며 분노를 정당한 방법의 항의로,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형태의 행동으로 표출하는 이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그래서 우리는 법원으로 갔다』를 읽는 동안 뻔뻔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함께 화를 냈고, 가벼운 처벌에 답답해했으며,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에 전국곳곳 방청을 다니는 모습을 숨가쁘게 눈으로 좇았다. 무기력에 빠져있던 나에게 팀 eNd는 솔직하게, 또 친절히 자신들의 경험담을 생생히 들려주며 길을 밝혀주었다. 마음속 응어리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느리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다
요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면 심심찮게 ‘여성안심 화장실’, ‘불법촬영 카메라 단속 중’이라는 스티커가 붙여진 곳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가 ‘몰카’라는 말 대신 ‘불법촬영’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가해자에게 한없이 관대한 태도를 보이던 판사는 시민들의 청원 이후 교체되었고, ‘N번방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성범죄 처벌 범위가 확대되고 수위 또한 상향되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한편 뒤를 돌아보면 새로운 길이 닦여있음이 보인다. 범죄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해진다. 세상이 다시 뒤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나와, 우리와 함께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 지쳐 잠시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산다고 해도, 좀 더 자신의 일상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해도,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빈자리를 채워줄 것임을 믿는다. 그 연속된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선의로 뭉친 연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여성재판방청연대 ‘연대단F’의 SNS 계정(@attend_f_trial)에는 최근 주요 성범죄 공판 일정이 정리되어 올라온다. 팀 eNd의 활동가들이 재판을 방청할 때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준 ‘연대자 D’의 계정(@D_T_Monitoring)에는 방청 기록과 재판 결과가 매일같이 정리되어 업로드되고 있다. 그 정보를 찬찬히 읽어보며 내가 참여할 수 있는 날짜를 찾아본다.
이렇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피해자들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아주 느리게 변화하는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잠시 지쳐 일상으로 돌아간 이들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한다. 우린 승리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세상을 바꾼 이들로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우리의 이름 한 글자 한 글자가 퍼질 수는 없어도 우리의 목소리는 하나로 모여 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함께일 것이다.” -뽀또 연대기, 『그래서 우리는 법원으로 갔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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