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을 깬 여자는 전진하여 새 길을 찾는다

[그림책 펼치는 마음] 노를 든 신부

안지혜 | 기사입력 2024/10/03 [12:00]

관습을 깬 여자는 전진하여 새 길을 찾는다

[그림책 펼치는 마음] 노를 든 신부

안지혜 | 입력 : 2024/10/03 [12:00]

그림책 『노를 든 신부』(오소리 지음. 이야기꽃)의 주인공 소녀는 신부용 드레스를 입고 바닷가로 나간다. 배를 가진 신랑을 구해서 섬을 나가는 것이 이 마을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신부들은 모두 두 개의 노를 갖고 있는 반면, 그녀는 노를 한 짝만 갖고 있다. 이 조건은 그녀에게 제약처럼 보인다.

“미안하지만, 노 하나로는 갈 수 없어요.”

신랑을 구하는 것도, 배를 타는 것도 불가능해진 신부는 산으로 올라간다. 숲을 쏘다닌다. 그러던 중 늪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사냥꾼을 만나게 된다.

“지금 밧줄을 찾고 있어요!”

“당신에겐 기다란 노가 있잖소!”

“오! 당신은 천재예요!”

이들의 인연은 어떻게 전개될까? 사냥꾼을 구한 신부는 그와 결혼하게 되는 걸까?

 

▲ 그림책 『노를 든 신부』(오소리 글 그림. 이야기꽃, 2019) 중에서.

 

이 신부가 섬마을을 떠나온 방법은 부모나 사회가 기대하던 방식과 달랐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싶다. 노를 한 짝 든 신부는 짝을 찾으려고 억지로 애쓰지 않았고, 허황되거나 종교화된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산에서, 들에서 만난 새 경험과 낯선 관계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아 간다. 스스로가 가진 힘과 도구, 재능을 알아차리고 삶의 재미를 발견해 낸다. 그것은 이 섬이 강요해 온 ‘신부’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드는 역사가 될 것이다.

 

『노를 든 신부』를 쓰고 그린 오소리 작가는 하나의 상상 이미지에서 이 그림책을 시작했다. 연관 없는 텍스트를 결합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진 작가는, 어느 날 숲을 뛰어가는 신부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 이미지는 신부가 삽을 들고 달리는 이미지로 이어졌고, 왜 삽을 들고 가는지 질문하면서 구체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갔다. 그 과정에서 “삽은 파내고 묻는 사물이지만, 노는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성질”이라고 여긴 작가는 삽을 노로 바꾸게 됐고 그렇게 노를 들고 거침없이 숲을 달리는 신부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이 이미지는 볼 때마다 내게 강력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서 돌진하는 여성의 에너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편, 웨딩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선입견을 깨부수는 통쾌함을 선물한다. 여성에게 빼빼 마른 몸과 뽀얀 피부,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울긋불긋한 피부에 두툼한 손과 어깨, 튼튼한 다리로 나아가는 신부는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적인 규범과 사회적 ‘정상성’, 젠더 이분법을 흐트러뜨린다. 수채물감을 덧칠하거나 벗겨내는 등의 기법으로 숲을 달리는 신부의 속도와 바람, 공기와 분위기를 역동적으로 표현한 그림 역시 독자의 감정을 더욱 끌어 올려준다.

 

▲ 그림책 『노를 든 신부』(오소리 글 그림. 이야기꽃, 2019) 표지 이미지


주제와 구성, 이미지의 변주만으로도 이 그림책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이 작품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그 중 하나는 작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소리 작가는 출판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기억력이 안 좋다 보니까 그림을 그릴 때에도 보고 외워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계속 그 사물에 대해 관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중략) 그런 부족한 점 때문에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모험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오소리 작가는 어릴 적부터 그림책 작가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재능이 없다거나 B급 인생이라는 등의 모진 말을 선생님과 같은 당대 어른들에게 들어왔다. 주의력결핍장애 같은 정보가 없던 시절, 성실하게 노력해도 소위 학교나 사회에서 ‘성과’라고 불리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던 작가는 스스로가 불필요한 존재라는 인식과 좌절을 겪어왔고, 폭력에도 자주 노출되었다. 오랜 시간 트라우마와 우울에도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작가는 시각예술 기획자이자 비평가인 한윤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자란 소도시에서) 당연시했던 어른들의 절대적인 말이 사실 그 장소를 벗어나면 의미가 없어지는 경험은 강하게 남아있어요. 예를 들면, 좋은 고등학교를 가야 앞으로 잘 살 수 있다, 결혼을 잘해야 한다, 같은 이야기들이요.”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창작물의 연결이 때로 작품의 창조적인 해석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소리 작가의 이야기는 낙인을 부순 여성의 이야기로, 결핍을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게 된 유머와 용기의 이야기로 자주 나누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작가의 자전적 서사에만 한정해서 이 책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노를 든 신부』는 낡은 관습을 깨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성에게 사회적 자본을 주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계속 전진해 가며 마침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낸 여성들의 삶을 빗댄 은유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 그림책 『노를 든 신부』(오소리 글 그림. 이야기꽃, 2019) 중에서.


“그녀가 길을 걸어가는 건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 위에서도 행복하기 위함이다.” 평론가 조경숙은 2020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하자센터가 만든 그림‧책 전시 〈헬로, 스트레인저!〉를 기념하며, 『노를 든 신부』에 대해 이렇게 평하여 아름다운 시선을 더해주었다.

 

“오소리 작가는 인물들에게 야망을 삭제한 채로 도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 여행은 실상 여성-청년들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같다. 성폭력, 유리천장, 노동불안, 취업제한, 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 실제로 2020년 대한민국에서 2030 청년 여성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우울증 환자 역시 청년 여성들이 가장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여성들은 불안하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 폭력과 싸우며,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한다. 검열과 동시에 야망을 제한적으로 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적당히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생존해야 한다. 이런 현실의 맥락과 『노를 든 신부』의 이야기는 서로 맞닿아 컨텍스트를 이룬다. 노를 든 신부는, 한 쪽짜리 노를 번쩍 들며 그냥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가끔 이렇게 정처 없이 살아도 되는 걸까 불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노를 든 신부』가 걸었던 길들의 색감을 떠올리면 작은 용기가 퍼져 나온다. 오소리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기승전결의 문법에서 벗어난 작업’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우리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꼭 목적지를 향해, 어떤 결말을 향해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일은 외로움과 불안 사이에서 떠도는 일일 수도 있지만, 곧 새로운 여행지에 닿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길 어딘가에서 언제나 편견을 깨부수는 여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신부는 그렇게 새로운 곳으로 떠났습니다.”

 

[필자 소개] 안지혜. 날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을 썼고 여러 권의 그림책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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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4/10/24 [11:45] 수정 | 삭제
  • 아직 그림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현실비판적인 강도가 센 느낌인걸요? 그림체도 너무 좋다.
  • 나나 2024/10/09 [21:23] 수정 | 삭제
  • 정말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JiAm 2024/10/04 [22:34] 수정 | 삭제
  • "당연시했던 어른들의 절대적인 말이 사실 그 장소를 벗어나면 의미가 없어지는 경험" 진짜 맞는 말!
  • 마이콜 2024/10/03 [23:52] 수정 | 삭제
  • 처음 작가님의 영감이 삽을 든 신부였다니!! ㅋㅋ 너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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