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까지는 아직 두 달 조금 넘게 남았지만, 2024년은 한국 미디어 산업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참담한 해였다. 퀴어/성소수자 서사가 이용당하고, 가려지고, 지워지는 일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퀴어서사’임을 드러낸 영화나 드라마는 혐오세력의 공격을 받아 상영이 취소될 위험에 처하는 일들까지 벌어졌다. 이런 일을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할까? 더 이상 반복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지난 일들의 문제점을 짚고 변화를 모색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
‘러브 윈즈 올’이 끝내 말하지 않은 것
올해 초, 아이유는 미니6집 앨범 발매를 앞두고 ‘러브 윈즈(Love Wins)’라는 노래를 발매하려고 했다. 1월 16일 신곡 예고 포스터엔 ‘Love Wins’라는 문구와 함께 아이유와 방탄소년단의 뷔가 테이블에 앉아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이 포스터가 공개되고 난 후, ‘러브 윈즈’가 어떤 이유에서 사용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러브 윈즈’는 성소수자 운동에서 매우 유명하고 중요한 슬로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이긴다는 이 말은 미국 성소수자 운동에서 동성혼 법제화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쓰였고, 한국에서도 혼인평등권을 이야기할 때 “사랑이 이긴다”는 말을 써왔다. 지난 7월 18일 대법원에서 동성 동반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을 때도, 이를 환영하는 말로 쓰였다. “사랑이 이겼다”고.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러브 윈즈’, 사랑이 이긴다는 말을 쓰게 된 건, 성소수자가 오랫동안 많은 곳에서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멸시의 이름으로 불렸고(사실 퀴어Queer 라는 말도 멸시의 뜻이 담긴 말이었지만 ‘이상한 게 뭐 어때서?’라고 대꾸하며 의미를 전복해온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노력으로 획득한 말이다), 폭력의 대상이었으며, 차별과 배제, 혐오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고 싸울 때, 성소수자들을 외쳤다. 내가 나인 게 왜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게 왜 사랑이 아니냐고. 결국 우리의 사랑이 당신들의 혐오를 이길 거라고.
그러니까 ‘러브 윈즈’는 예쁜 슬로건이 아니고, ‘성소수자 지지’의 말이라는 설명도 그 의미가 충분치 않다. ‘러브 윈즈’는 통제와 억압, 혐오와 싸워 이긴, 그리고 여전히 싸움을 마주해야 하는 성소수자들이 내는 생존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런 역사와 맥락이 있는 ‘러브 윈즈’가 아이유의 노래 제목이라니, 그것이 곡에 어떻게 녹아들었을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말이 가진 힘을 아는 이들은 약간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를 소개하는 아이유의 메시지에선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과 혐오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메시지를 읽어보면 이 사랑은 아이유와 팬들의 사랑이다.
이후 성소수자 커뮤니티 등에서 ‘러브 윈즈’가 성소수자의 슬로건으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역사와 의미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이런 제목이 쓰이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화적 전유’라는 지적이었다. 문화적 전유는 어느 문화집단이 다른 인종이나 소수 문화집단의 문화와 정체성 요소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주로 주류 문화가 비주류 문화를 마치 자신들의 것인양 차용해 쓰는 것을 가리킨다. 흑인이 아닌 인종의 사람이 드래드 머리를 하는 것, 어느 인종이나 부족의 문화를 패션으로 이용하는 것 등이다. 여기서 문제는 타 문화의 ‘다름’을 자신을 빛내줄 ‘힙한 것’으로 써버리는 것이다. 이해와 존중 없이.
삭제된 부용이
작년, 인기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 그림 나몬)가 드라마화 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난 후 많은 이들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정년이〉는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며 큰 인기를 얻었던 여성국극을 다룬 작품이다. 여성국극은 노래, 춤, 연기를 선보이며 여성, 남성 배역을 모두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일종의 국악 뮤지컬로, 여성팬 무리를 이끈 그야말로 원조 아이돌이었다. 또한 이 여성국극은 퀴어한 정동이 듬뿍 담긴 장르이기도 하다.
김혜정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2013)엔 여성국극에서 남역을 맡았던 배우들의 당시 인기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팬들의 엄청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열성 팬의 요청으로 결혼식 사진까지 찍어줄 정도의 퀴어한 사랑들이 그 곳에 있었다.
웹툰 〈정년이〉에도 여성국극 매란단의 단원인 정년이와 그의 1호 팬인 부용이 이야기가 나온다. 부용이는 정혼자가 있지만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여성에 대한 끌림을 느끼고 있는 인물로, 정년이가 국극단원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물론, 자신 또한 각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부용이는 작가가 되고자 극본을 쓰고 있지만 여성이라는 위치로 인해 그 꿈을 좀처럼 펼치지 못하고 결혼만 종용 받는다. 부용의 이야기는 〈정년이〉에서 중요한 페미니즘 서사이기도 하다.
지난 10일, 드라마 〈정년이〉의 첫 방영을 앞두고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정지인 PD는 부용이가 삭제된 부분에 대해선 자신 또한 아쉬움이 있다며 “(부용이는) 정년이의 첫 팬이기도 하고, 퀴어 코드도 있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나아가려는 정체성이 있었다. 한 캐릭터에 그런 요소를 담기 보다는 드라마 전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작가님, 배우들과 함께 상의해서 나름대로 담아냈다”고 했다. 연출자의 의도가 앞으로 드라마에서 어떻게 보여질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결국 원작에서 레즈비언 정체성을 보여줬던 부용이가 지워졌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미디어에서 퀴어 캐릭터가 사라지는 건 왜 문제인가? “미디어는 한 사람이 현실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일을 뛰어넘어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을 만나게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미디어마저 제한된 세상을 보여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로 대다수 사람은 (소수자 위치에 놓인) 다른 이의 삶이 어떠한지, 아니 존재하는지조차 상상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성소수자의 존재에 대해서, 여전히 다수의 사람은 자기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일평생 한번도 본 적 없다고 생각한다.” -책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박주연 지음, 오월의봄)
퀴어 서사이지만, 잘 드러나지 않게?
10월 1일 개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이언희 감독)은,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창비) 중 “재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이야기는 이성애자 여성 재희와 동성애자 남성 흥수의 우정을 다룬다. ‘정상성’ 중심 사회에서 비껴가는 두 사람이 서로 지지자가 되어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염려는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 초반부터 흥수가 게이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남남 키스씬도 연이어 나온다. 영화 속 재희와 흥수의 뜨거운 우정 또한 그동안 우리 사회가 남녀의 우정을 이성애중심 사고 아래 여사친과 남사친으로만 상상해 온 편견을 깰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퀴어 서사’를 드러내지 않고 홍보했을까? 이성애 로맨스라고 생각한 관객이 이 영화를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 물론 이 영화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고, ‘퀴어 서사’라면 피할지 모르는 관객까지 포섭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내가 영화를 봤을 때도 극장 안은 대부분 이성애 커플인 듯 보이는 관객들이었고, 가족 단위 관객들도 있었다.(한 가족은 남남 키스 장면이 나오자 극장을 나갔다.) 그들 중 어떤 사람, 특히 비퀴어인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퀴어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면, 영화의 마케팅은 성공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은 것일까?
이후 아사히신문에서 이 일에 대해 감독과 영화 평론가, 반차별 운동가이자 작가를 한 자리에 모아 대담을 진행했다.(원문: asahi.com/articles/ASS323PGSS2WULLI00F.html 2024년 3월 15일 코다마 미즈키, 번역: 잡지 『프리즘 오브』 31호: 괴물 중 “영화 〈괴물〉 퀴어를 둘러싼 비판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응답: 세 시간 반의 대화”, 번역 박휘상)
이 대담에서 코다마 미즈키 평론가는 “(퀴어 서사가 드러나는) 영화의 3장을 숨겨 두는 것이 퀴어성을 숨겨 두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창작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러한 홍보 방식이 사회에 ‘퀴어는 숨겨 두어야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버리면 그것은 차별이 된다.”고 짚는다.
이어 츠보이 리오 작가는 “그간 퀴어는 몇 번이고 보편적인 이야기에 삼켜져 ‘개조’되어 왔다. 동성 간의 러브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게 된 사람이 우연히 동성이었다’라는 식으로 덧칠되거나,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비소수자에게만 유리한 이유로 정체성이나 연애 감정이 지워지거나, 투명한 것처럼 취급되어 온 역사가 있다. 이를 생각하면 숨겨 두는 행위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영화의) 3장에 숨겨져 있는 것은 퀴어성이 아닌 ‘우리의 가해성’이며 그것이 재귀적으로 이해될 것이라 여겼다”고 말했지만, 영화의 홍보 방식에서 많은 이들은 ‘퀴어성’이 숨겨져 있다고 받아들였다. 이에 코다마 씨와 츠보이 씨 모두 정확히 말한다. 그것이 차별이 될 수 있다고.
다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돌아와서, 이 영화는 ‘퀴어 서사’임이 숨겨진 채 홍보됐다. 그 결과, 그럼에도 이 영화에 퀴어 서사가 담긴 걸 아는 나와, 그걸 모르는 관객이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 난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 아니 두려움까지 느꼈다. 영화에 퀴어 서사가 담겼다는 걸 알게 된 누군가가 혐오 발언 혹은 행동을 할까 봐. ‘이런 내용인 거 알았어?’라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슬픈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가장 슬프고 비참한 건, 당사자조차 왜 퀴어 서사가 사라지고, 지워지고, 숨겨지는지 모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며칠 전, 21일 공개될 드라마 시리즈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이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고편이 비공개로 변경된 일이 있었다. 영화와 동일하게 책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예고편에선 주인공인 고영이 남성 동성애자로서 사랑을 찾고 연애를 하는 장면들이 담겼다. 원작자이자 드라마 시리즈 각본을 담당한 박상영 작가는 SNS를 통해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모 단체에 좌표 찍히고, 관련 부서 민원 폭탄 들어간 덕분에 결국 공식 예고편을 모두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혐오세력들은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동성애 미화, 조장 드라마 제작 지원한 문체부는 각성하라!”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월 30일, 대전광역시는 보조금 지원사업으로 운영되는 대전여성영화제 초청작 중 영화 〈딸에 대하여〉가 ‘성소수자를 다루어 사회적 논란’이 있다며 “양성평등주간 기념행사 취지에 맞지 않다”면서 상영 철회를 요구했다. 영화제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기에, 누군가는 움츠러든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난 받고 공격 받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견디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퀴어 서사를 지우고, 숨기고, 없앤다면 앞으로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피하기만 한다면 ‘혐오 없는 세상’이 오는 게 아니라, 혐오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된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제작발표회가 열린 16일, 고영 역을 맡은 남윤수 배우는 혐오세력들의 반발, 비난에 대해 “신경쓰이지 않았다.”며 “그런 사람은 100명 중 한 명이었고 오히려 응원의 메시지가 진짜 많이 왔다. 자고 일어나면 (SNS로) 메시지가 백개씩 와 있다. 장문의 메시지도 있고… 요며칠 사이에 엄청 많은 변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이렇게, 혐오에 맞서는 방법은 분명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쳐야 한다. 퀴어 서사의 가려짐, 부재 그리고 삭제는 그냥 어느 캐릭터의 삭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변화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일, 그 기회가 사라지는 일이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게 둘 것인가? 우리에겐 변화를 위해 각자가 해야 할 몫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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