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싸게 해줬으면’ 하는 돌봄?

[우리의 돌봄을 이야기하다] 돌봄 사회로의 전환

조한진희(반다) | 기사입력 2024/10/28 [09:57]

‘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싸게 해줬으면’ 하는 돌봄?

[우리의 돌봄을 이야기하다] 돌봄 사회로의 전환

조한진희(반다) | 입력 : 2024/10/28 [09:57]

작년 유엔 총회에서 10월 29일을 “국제 돌봄 및 지원의 날”로 정했습니다. 올해 한국의 여성, 장애, 청년, 노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 29개 단체들이 모여 ‘10.29 국제돌봄의날 조직위원회’를 꾸리고 10월 28일~11월 2일에 돌봄 공공성과 지속가능한 돌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돌봄의날 주간을 맞아, 조직위원회 참여단체의 활동가들이 ▲돌봄중심사회로 전환 ▲국가가 책임지는 돌봄공공성 확보 ▲돌봄노동 가치 재평가 및 처우개선 ▲돌봄권리 보장을 주제로 기고글을 연재합니다. [기획의 말]

 

‘돌봄의 사회화’는 어떤 걸 의미할까

 

“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안전하게 저비용으로 해줬으면 하는 일, 그게 돌봄이 처한 정직한 현실 아닐까.”

나는 몇 년 전 『돌봄이 돌보는 세계』(동아시아, 2022)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당장 적극적 돌봄을 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돌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숨막혀 하는 사회 곳곳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리게 된 결론이었다. 돌봄 책임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품게 된 시대에 대한 성찰이었고, 사실 절박한 나의 심경이기도 했다.

 

“내 손으로 밥숟가락 뜰 때까지만 살겠어.”

당시 나는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돌봄 받는 몸을 혐오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런 문장으로 설명했다. 더이상 내 손으로 밥숟가락 뜰 수 없고 일상적으로 타인의 돌봄을 받게 되는 상황이 오면, 민폐 끼치지 말고 죽는 게 낫다는 정서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자신의 손으로 밥숟가락을 떠먹지 못하며 살아가는 중증의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삶의 존엄은 가늠되지 않는다. 질병, 장애, 노화와 함께 살며 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몸에 대한 배제와 혐오적 태도, 이는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 서울시사회서비스원 폐지 저지 기자회견에서의 피켓. “나는 시장돌봄이 아닌 공공돌봄을 원한다.” (출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


돌봄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사적 영역에서 사랑과 헌신으로 여겨진 돌봄을 ‘노동’으로 명명하며, 돌봄을 성역할의 이름으로 자연화하며 탈가치화 해온 역사에 저항했다. 1970년대 가사노동 임금화 캠페인이 그 일부였다. 페미니스트들은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에서 여성에게 무급으로 전가된 돌봄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돌봄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돌봄을 사회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자본의 입장에서도 여성을 임금시장으로 호출하기 위해 일정 정도 돌봄의 탈가족화 혹은 사회화가 필요했다.

 

한국 사회에서 ‘돌봄의 사회화’는 2000년대 본격화되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장애인활동지원법 등이 제정되고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같은 새로운 이름의 직업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돌봄노동의 의미, 돌봄이 성별화된 현실, 돌봄 위기를 내재하는 체제 등에 대해 사회적으로 제대로 논의되지는 못했다. 결국 돌봄의 사회화가 ‘시장화’ 형태로 진행됐고, 돌봄노동이 빈곤 여성들에게 저임금으로 외주화되었다. 결국 새로운 불평등이 시작되는 비극을 낳았다.

 

나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1990년대 중후반, 나는 여성운동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여성주의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몇 년간 공동 주거를 했다. 당시 우리는 ‘무엇이 여성주의 공동체인가’에 대해, 그리고 ‘보살핌 윤리’(지금은 돌봄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쓰지만 오랫동안 돌봄과 보살핌은 함께 쓰였다)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일상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크고 작은 살림을 하는 것의 어려움과 의미를 나눴다.

 

또한 여성단체에서 상임 활동을 하면서 가사노동 재평가나 사회화에 대한 피켓을 만들고 관련 토론회 등을 마치고 퇴근해 집에 돌아왔을 때도, “가사노동은 유의미한 노동”이라는 말 정도를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돌봄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화되어야 하는지, 돌봄이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에 갇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충분한 토론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보살핌(돌봄)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윤리를 삶 속에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돌봄의 사회화’가 시장화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대응 전략은 제대로 논의하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최근 몇 년, 돌봄은 역사적으로 유래없이 핫 이슈가 됐고, 사회의 중심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돌봄 공공성’이라는 말이 확산되고 있다. 시민사회는 물론이고,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과거 ‘돌봄의 사회화’ 구호가 2020년대 ‘돌봄 공공성 강화’라는 구호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돌봄의 공공성이 무엇이고, 어떤 상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는 역시나 잘 토론되지 않고 있다.

 

▲ 서울시사회서비스원 폐지는 곧 공공돌봄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피켓. (출처: 공공운수노조)


‘돌봄 공공성 강화’라는 구호가 빠르게 확산된 것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2022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서울시사회서비스원 폐지 이슈일 것이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이하 서사원)은 ‘공공돌봄’의 상징이었다. 서사원 폐지는 사실상 윤석열 정부의 ‘사회서비스 고도화’ 전략, 즉 사회서비스의 민영화와 시장화 강화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 정부는 사회서비스를 고도의 이윤 창출 도구로 삼아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시장화 전략에서 공공성은 큰 걸림돌이고, 작은 규모지만 공공돌봄 기관으로 자리하고 있던 서사원을 폐지시킨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돌봄 공공성 강화는 당연한 구호였고, 많은 시민의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한편, 서사원을 존속시키는 것 이외에 ‘돌봄 공공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했을 때 뾰족한 논지들은 없었다. 돌봄 공공성은 어디까지를 포괄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사원같은 공공기관이 돌봄을 제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돌봄 공공성 논의는 ‘사적 영역에서 개인이 책임지는 돌봄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다양한 연결망 안에서 돌봄의 관계와 책임을 평등하게 나누는 공동의 노동이자 활동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이 돌봄 사회의 기반이다

 

무엇보다 돌봄 공공성 강화 요구가 국가의 책임을 호출하는 것으로만 집약되어선 안 된다. 가족 혹은 여성의 성역할로 수행되던 돌봄을 국가가 대체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일로 본질화 했던 것을 국가의 일로 본질화하는 것은 또다른 위험을 부를 수 있다. 돌봄은 국가가 맡고, 일터에서 영혼을 털어 노동에 집중하는 게 우리가 바라는 미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돌봄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돌봄 정책을 만들어왔다. 앞으로도 더 값싸게 돌봄을 외주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고, 최소한의 노동권도 보장되지 않는 ‘필리핀 가사노동자 시범사업’에 이어 더욱 ‘나쁜 제도’들을 도입할 가능성도 높다. 이에 대한 감시와 견인도 필요하지만, 설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시민들이 돌봄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돌봄 문제의 ‘해결’일 수는 없다. 

 

▲ 2023년 9월 7일, ‘다른몸들’에서는 독일돌봄혁명네트워크 제안자인 가브리엘 빈커 교수를 초청해 “돌봄사회를 향한 사회운동” 주제로 온라인 강연을 주최했다. (출처: 다른몸들)


2023년 ‘다른몸들’에서는 독일돌봄혁명네트워크 제안자인 가브리엘 빈커 교수를 초청해서 〈돌봄사회를 향한 사회운동〉이라는 강연을 개최했다. 빈커 교수는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독일의 경우, 현재 금속 등 제조업의 노동시간은 주당 35시간인데, 더 줄이기 위해 협상 중이라며, 주4일 노동 실험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이 돌보는 사회를 향한 중요한 기반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참고로 2021년 기준 한국은 독일보다 연간 566시간을 더 오래 일하고, OECD 평균보다는 199시간 더 오래 일한다.)

 

일터에서 장시간 영혼이 탈곡될 정도로 노동을 하고 나면, 누구도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남지 않는다.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것은 괴로움으로 느껴지고, 돌봄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마저 선택지도 적다. 돌봄 책임을 견뎌주거나 회피하기 어려운 가족 구성원에게 떠넘기거나, 최소한의 비용으로 외주화하는 방법 정도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말한 ‘모든 시민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을 많은 이들이 절실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간 단축을 포함한다. 결국 돌봄 중심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돌봄 위기를 초래한 사회 구조 전반을 바꿔내는 일이다.

 

돌봄 중심 사회를 상상하고 논쟁하자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 아름답지만 막연한 구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사회의 ‘중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성차별주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의 구조와 제도가 어떻게 돌봄 위기를 초래하거나 강화했는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을 추앙하면서, 적극적 의존과 돌봄이 필요한 몸은 쓸모 없는 몸이라는 관점을 생산했다. 이를테면 아픈 몸은 ‘자기관리에 실패한 몸’으로 만들었고, 높은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몸은 ‘나쁜 몸’이 되었다.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은 생산 중심으로 인간의 쓸모를 서열화한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고, 인간의 취약성을 보편적 특성으로 수용하면서 서로 의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재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혈연이나 가족이라는 관계를 넘어, 모든 사회 구성원 전반이 돌봄을 성별, 빈부, 인종 등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분담하고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 2024년 8월 27일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다른몸들’과 ‘서울시사회서비스원 폐지 저지와 공공돌봄 확충을 위한 공대위’가 주최한 〈우리에게는 시장화된 돌봄이 아닌 더 많은 공공 돌봄이 필요하다〉 시민토론회에서 발언하는 필자 모습. (출처: 공공운수노조 서사원지부)


돌봄 중심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더 많은 상상과 토론이 필요하다. 그 사회는 누군가에 대한 돌봄 책임을 회피해야 ‘성공’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돌볼수록 더 취약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적극적으로 의존하고 돌봄 받는 몸이 수치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돌봄이 누군가 대신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아니라, 돌봄을 통해 인간 그리고 비인간 종과 교감하며 설레임과 연대감이 확장되는 사회일 것이다.

 

결국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근원적 가치체계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투쟁하고, 합의하는 시간과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다. 지금과 완전히 다른 가치체계와 구조를 가진 사회로 이행한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돌봄은 혁명이 되어야 한다.

 

[필자 소개] 조한진희. 정상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위에서 질병권과 돌봄 등을 주요 의제로 하는 ‘다른몸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고, 『돌봄이 돌보는 세계』, 『포스트 코로나 사회』,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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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디에 2024/11/14 [11:56] 수정 | 삭제
  • 제목 보고 좀 찔렸습니다. 나도 결국 그런 걸 원했구나 싶어서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곤 하는 대책없는 생각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네요.
  • 공감 2024/10/31 [11:40] 수정 | 삭제
  • 누가 마음적인 부분이라도 의지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 2024/10/28 [13:51] 수정 | 삭제
  • 분담해줬으면 하는 돌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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