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의 플라스틱, 수요 넘어서는 공급

도시 생활의 경제학③ 몸 씻는 이야기

| 기사입력 2024/11/02 [10:10]

욕실의 플라스틱, 수요 넘어서는 공급

도시 생활의 경제학③ 몸 씻는 이야기

| 입력 : 2024/11/02 [10:10]

이 글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재사용한 글이다. 소로는 『월든』에서 ‘숲 생활의 경제학’을 펼쳤다. 일반적인 경제학은 자본으로 어떤 상품을 만들어서 어떤 가격에 얼마나 많이 팔아서 얼마나 큰 이윤을 남길지 계산하지만, 소로는 숲에서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계산했다. 이를 통해 문명으로 얼룩진 삶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려 했다.

 

현대에 도시에 사는 한국인이 삶의 비용을 계산하는 일은 여간 복잡하지 않지만, 나는 일단 도시 생활에 드는 플라스틱 값을 계산하기로 했다. 2024년 1월부터 6월까지 지출한 플라스틱 값을 토대로 1년 치를 계산해 ‘도시 생활의 경제학’을 펼쳐보기로 했다. 글 곳곳에는 『월든』이 배어 있다. 소로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고, 그 허세를 빌리기도 했다는 점을 밝힌다. [기획의 말]

 

도시의 거품들

 

지난번에는 내 옷을 빠는 이야기로 글을 마쳤다. 이번에는 내 몸을 씻는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샤워실에 들어가면 2층짜리 스테인리스 선반이 있다. 언니가 이사 갈 때 버리려던 것을, 역시나 버리려던 락스로 씻어서 가져왔다.

 

선반 2층에는 내가 씻을 때 쓰는 세제들이 있다. 가장 먼저 쓰는 건 샴푸이다. 이 샴푸는 언니가 다니는 회사에서 만들었다. 언니 회사에서 굴러다니던 샴푸를 언니가 챙겨 주었다. 유통기한은 작년까지였고, 올해 봄 처음 쓰기 시작했다. 언니가 샴푸를 계속 공급해 주니 샴푸를 살 필요는 없다. 샴푸바처럼 플라스틱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는 비누를 살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이미 만들어진 플라스틱을 치우는 일이 급선무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난 뒤에는 얼굴을 씻는다. 가장 먼저 러쉬의 세정제인 아쿠아 마리나로 선크림을 지워낸다. 아쿠아 마리나는 22,000원이다. 100g짜리를 사서 2달 반 정도 사용한다. 100g을 다 쓸 때쯤이면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게 지나 있다. 경험상 러쉬 제품은 유통기한이 넘는 즉시 상하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일주일 정도는 괜찮겠지 하면서 쓴다. 1년에 대략 5번 산다고 생각하면 110,000원이다. 싼 가격은 아니다. 그래도 플라스틱 통을 모아서 가져다주면 러쉬가 재사용해 주리라는 미약한 기대가 있다. 아쿠아 마리나는 국내 생산이니, 아마 러쉬의 다른 제품에 비해 탄소도 덜 배출할 것이다.

 

다른 클렌징 크림을 사 본 적도 있다. 작년에 사서 아직도 남아 있는데, 쓰면 여드름이 나는 것 같아서 잘 쓰지 않는다. 가끔 화장해서 아쿠아 마리나만으로는 세안이 안 될 때, 혹은 팔다리에 선크림을 발랐을 때만 이 클렌징 크림을 사용한다. 하지만 플라스틱 통이 생각보다 두꺼워서 다시 사지는 않을 것이다.

 

▲ 재사용해 주리라는 기대에 모으고 있는 플라스틱 통 (사진: 초)


아쿠아 마리나만 쓰면 또 여드름이 나는 것 같아 클렌징폼도 사용한다. 원래 사용하던 클렌징폼은 여드름용이 아니었는데, 점점 이유 없이 여드름이 늘어나서 여드름용 클렌징폼을 사 보았다. 23,000원이었다. 새로운 클렌징폼을 쓰자 여드름이 바로 들어갔다. 사회적 미의 기준에 길들여진 탓인지, 여드름 없는 피부는 포기하지 못하겠다. 아마 올해 한 번쯤은 더 클렌징폼을 살 것 같다. 원래 쓰던 클렌징폼은 비상용으로, 혹은 청소용으로 쓰려고 구석에 치워 두었다.

 

세안 후에는 몸을 씻는다. 몸은 주로 비누로 씻는다. 친구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천연비누를 사용한다. ‘천연’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일단 명칭은 천연비누이다. 적어도 플라스틱 통 안에 든 다른 세제처럼 미세플라스틱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친구 어머니의 비누를 받은 이래로 나는 비누가 바닥나 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의 모든 생산품이 그러하듯, 선물 경제의 여느 선물이 그러하듯 공급은 항상 수요를 넘어선다.

 

가끔은 여성청결제를 사용한다. 역시 언니 회사에서 나와서 강제로 떠맡게 되었다. 여성청결제를 원래 용도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원래 용도대로 쓰면 몸에 좋을 리 없다는 기분이 든다. 발을 씻으면 좋다는 언니의 전언에 따라 발을 씻는 데 주로 쓴다. 가끔은 바디워시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여성청결제로 전신을 씻고 나오면 몸이 따가울 때도 있다. 그래서 매일 사용하지는 못한다.

 

또 가끔은 겨드랑이 면도기를 사용한다. 칼날 옆에 비누가 달린 형태이다. 비누를 다 쓰면 칼날을 버리고 새 칼날을 사서 끼우면 된다. 작년 여름에 산 칼날을 아직 쓰고 있다. 올해까지 쓰고 칼날을 갈면 될 것 같다. 작년에 미국 모 학회에 갔을 때, 제모를 하지 않고 나시를 입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팔을 들었다. 한국에서도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칼날을 새로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선반 위의 비누와 면도기. 원래 벽에 붙이는 면도기 거치대가 따로 있었다. 일 년 정도 지나니 거치대의 흡착판이 자꾸 떨어져서 버렸다. 흡착판을 새로 사고 싶지 않아서 그냥 비누받침 위에 올려놓고 쓰고 있다. (사진: 초)


선반 1층에는 청소용으로 쓰이길 기다리는 샴푸가 두 통 있다. 두 통의 바닥에 눌어붙은 샴푸를 다 쓰는 게 더 빠를지, 내가 기숙사를 나가는 게 더 빠를지는 알 수 없다.

 

샤워실 뒤편에는 룸메이트의 샴푸와 바디워시가 늘어서 있다. 나와 6월까지 같이 산 룸메이트는 한국인이 아니다. 룸메이트는 사나흘에 한 번 씻었다. 헬스장에서 씻고 오는 날도 있는 듯하였지만, 어쨌든 매일 씻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사람도 있으니 지구가 그나마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물론 매일 씻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냄새가 유쾌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위생에 집착하는 것만큼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행동은 없다. 한국인은 그 밖의 냄새는 좀 견딜 줄도 알아야 한다. 냄새를 견딜 줄만 알았어도 4, 5월부터 에어컨을 트는 일은 없었을 터이다.

 

우리는 몸을 굳이 씻어낸 뒤 다시 무언가를 바른다. 다음에는 무언가를 바르는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필자 소개] 초: 대학원생이다. 환경과 이주 문제에 관심이 있다. 이 두 문제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전공에서 박사논문 주제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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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 2024/11/07 [15:04] 수정 | 삭제
  • 내용이 신선하네요. 플라스틱 그만 사고 싶어요
  • 독자 2024/11/07 [11:43] 수정 | 삭제
  • 흥미로운 글이군요. 제로웨이스트샵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 DNA 2024/11/04 [15:16] 수정 | 삭제
  • 재밌네요.. 몸에 바르는 이야기도 기다릴게요.
  • 돌돌이 2024/11/04 [12:56] 수정 | 삭제
  • 샴푸바 쓰는 게 통이 안나와서 좋긴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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