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vs. ‘베트남 경제특수’ 구도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1999년 5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폭로한 〈한겨레21〉의 보도였다. 당시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은 베트남 정치국에서 낸 ‘전쟁범죄 조사보고서-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을 입수한 뒤, 학살 현장을 찾아가 이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거나 이를 목격한 참전군인들을 인터뷰한 고경태 기자의 연속 보도가 이어졌다.
첫 보도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민간인 학살’은 간헐적으로 지면과 공론장에 등장했다. 한베평화재단의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통해 한국인들이 학살 피해지역을 방문하여 위령제에 참여하거나,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는 시민 차원의 활동이 이어져 왔다.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피고 대한민국은 승소 결과에 불복하여, 현재 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며 1월 17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인식과 담론의 지형은 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베트남 경제특수’(1964년부터 1973년에 걸친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 기간에 외화 수익을 통한 사회 경제적 효과를 말한다)로 대립하는 두 개의 틀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다.
이런 한계 속에서 열린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은 민간법정으로서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 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기획이었다. 피해와 가해의 자리에 놓였던 이들을 오가며 증언을 확보하고, 국가에 법적 책임을 물었다는 점, 참전군인의 가해 목격담을 계기로, 국가에 책임을 묻는 것과는 다른 층위에서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청자들이 ‘가해자성’에 대한 고민과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실제 국가배상청구소송으로 이어졌다는 점 등이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참전군인을 인터뷰하는 구술활동을 통해 말하고-듣고-기록하고-공유하는 장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들 또한 새롭게 등장했다.(석미화,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 세종피앤피, 2023) 또한 기후위기를 둘러싼 담론이 쏟아져 나오면서, 베트남전쟁이 초래한 생태계와 서식지 파괴에 대한 동시대적 관심이 증가했다. 고엽제 후유증을 겪고 있는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에 대한 논의 또한 미미하게나마 시작되고 있다.(신다은, 「표지 이야기-국가가 외면하는 ‘고엽제 후유증’ 대물림」, 『한겨레21』 제1531호, 2024-09-30)
그러나,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젠더기반 폭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본격적인 국내 연구가 없다. 또한 민간인 학살 관련 이슈들도 한-베 두 국가 간의 ‘외교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뤄져 온 한계 속에 갇혀 있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피해자들을 ‘국가’라는 집단으로 묶어버릴 때, 가해자들 또한 구체성을 잃고 집단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국가폭력의 외교 문제화’라고 부른다.(2018년 3월 3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후지이 다케시의 강연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베트남전쟁, 국가 그리고 ‘나’〉의 내용 중.)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의 ‘외교 현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의 문제를 국가 간 외교 문제로 보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끌어낼 ‘결정적인 증거’에 대해 논의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일어난 ‘폭력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베트남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또한 한국-베트남 정부 사이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생각해버리면, 국가가 강요한 폭력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자들이, 그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바꾸는 일조차도 다시 국가에 귀속시키고 마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단일한 쟁점 너머, 더 확장된 시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단일한 쟁점을 넘어, 베트남전쟁에 대한 다른 층위의 문제의식을 제시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있다.
윤충로의 「베트남전쟁 시기 ‘월남재벌’의 형성과 파월(派越)기술자의 저항 - 한진그룹의 사례를 중심으로」(『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제79권, 2008)는 베트남전쟁 당시 경제특수가 기업과 개인의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던 과정과 방식, 그리고 이것이 지닌 사회사적 의미를 살핀다. 이는 『두번째 베트남전쟁』(푸른역사, 2023)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심주형의 「탈냉전(Post-Cold War) 시대 ‘전쟁 난민’ 재미(在美) 베트남인들의 문화정치 : 비엣 타인 응우옌의 저작들을 중심으로」(『동방학지』 제190호,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0)에서는,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전쟁 난민’인 재미 베트남인의 삶과 기억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자기중심적인 기억윤리를 탈피한 ‘공정한 기억’의 윤리를 모색하고 실천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주의와 젠더 관점에서, 김미덕은 「베트남 전쟁 시 미국 적십자 여성의 활동」(『여성학논집』 제32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2) 논문을 통해 베트남전쟁 당시(1962~1975) 미국 적십자 여성의 활동을 살피고 있다.
‘영웅 서사’와 ‘피해 서사’로 짜깁기된 전쟁의 기억 베트남전쟁 공식 서사에 기록되지 않은 가해와 피해
전쟁의 명칭을 둘러싸고 상충하는 호명들 사이에서도 베트남전쟁의 특정한 단면들이 부각되거나 혹은 은폐되어 온 역사가 있다. 어떤 이들은 ‘베트남전쟁’이라 부르고, 다른 이들은 ‘항미구국항전’이라 부르는 ‘이 전쟁’의 호명 방식은 그 어느 쪽도 베트남과 미국 이외의 나라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동족 간 학살과 폭력’, 그리고 국민의 틀 바깥에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의 전쟁 경험과 피해 상황 역시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1975년 북베트남의 승전 결과로 이뤄낸 통일 이후, 남베트남 출신자들의 경험은 미국과 베트남 양쪽의 기억에서 모두 배제되어왔다. 승전과 패전,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담론 속에서 남베트남 출신자들이 겪어낸 전후의 삶이 미국에서는 제한적으로나마 ‘이민사’의 형태로 확보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전후 실시된 재교육과 강제이주, 남베트남 출신자에 대한 여러 차별 정책 등의 영향 하에, 패전의 경험이나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은 좀처럼 말할 수 없는 역사로서 베트남 공식 서사에서 말소되어왔다. 전쟁 수행과 전후 복구를 위한 소수민족의 강제이주와 전쟁동원, 그리고 그로 인한 이산(離散) 경험들 또한 마찬가지다.
‘항미구국항전’에 기록된 사망자 수 310만 명에는, 북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경유하여 군대와 군수품을 보내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는 미국의 폭격으로 죽거나 다친 존재들은 셈해지지 않았다. 또한 위의 두 가지 호명은 다른 참전국들, 즉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러시아, 북한, 중국 등의 개입과 그로 인한 전쟁 책임의 확장 가능성 또한 지우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남베트남 패배의 유산을 안고 ‘보트피플’로 미국에 이주한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는 특정한 전쟁의 이름을 모두 거부하고 ‘그 전쟁’, ‘이 전쟁’으로 지칭하거나, 궁극적으로는 ‘나의 전쟁’이라는 호명 방식을 택한다. 과거의 전쟁을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와 삶의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시 상상하고 기억하기 위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이다.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은 1971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에 해상 난민이 되어 미국으로 이주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남베트남 진영에 속한 부모 밑에서 미국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하며 자란 그의 독특한 포지셔닝은 『동조자』(김희용 옮김, 민음사, 2018)라는 장편소설로 구현되었고, 이 작품으로 2016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를 원작으로 2024년에는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HBO드라마 시리즈 〈The Sympathizer〉가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의 베트남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국가를 잃은 한(恨)을 되새기는 행사를 통해 북베트남의 승전을 여전히 거부하고, 자신들을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로 정체화하고 있는 남베트남 출신 사람들 중 상당수가 남베트남의 관료, 정치인, 군인, 경찰로 전쟁을 수행했던 이들이라는 사실, 고문과 폭력을 일삼던 가해자들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외세의 침략과 부정의에 맞선 정의의 실현’이라는 문구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러 전시와 기념물 그리고 헌법 전문에까지 승전을 민족-국가-당이 함께 이루어낸 역사적 성취로 기입해 온 북베트남 또한 마찬가지다. ‘승전’에 대한 영웅적 기억 서사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억압받는 ‘피해의 자리’에 베트남 민족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외국의 침략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억압당하는 자’로만 인식하는 피해 서사에는 ‘서로에게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성찰이 설 자리가 없다.
또한 이러한 설정에는 서쪽으로 전쟁을 확장하여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끌어들이고, 통일된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했던 기억, 형제 나라 중국과의 국경전쟁, 후에에서 벌어진 북베트남군에 의한 내부 학살 등이 ‘항미구국전쟁’이라는 호명 아래 은폐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전쟁이 종료된 후에도, 호치민 트레일이 있었던 비무장지대 꽝찌 성에서는 7천 명이 넘는 지역 주민들이 땅 속에 묻혀있던 전쟁의 잔여물로 인해 사망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나 애도의 자리는 없다.(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부희령 옮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봄, 2019)
기념비에 새겨지지 않은 이름들,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애도’의 가능성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에 해당하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군대 ARVN(Army of the Republic of Vietnam)에 속해 전사한 군인들 또한 통일 베트남에서는 공식적인 추모의 자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당-국가가 주도하는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영웅 서사적 재현 작업이 ‘기록 없는’ 혹은 ‘정치적 가치가 없는’ 희생자들에 대한 배제의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베트남 중부, 서부 고원, 그리고 남부의 희생자들에겐 여전히 ‘공식 서사’가 부재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마야 린(Maya Lin)이 설계한 워싱턴 D.C의 검은 벽에 새겨진 전사자 5만 8천여 명의 이름 속에는 전쟁에서 귀환했으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퇴역군인들을 위한 애도의 자리는 없다. 한국의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새겨져 있는 5천여 명의 전사자 명단에서도, 전쟁에서 돌아와 자살한 병사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CIA와 함께 싸웠던 몽족 병사들의 죽음 또한 베트남전쟁의 공식 서사에는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공식 서사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들에 대해서, 국가에 인정을 호소하고 간청하는 것을 넘어서는 애도란 불가능한 것일까? 공식 서사나 추모의 자리에서 밀려난 이들의 존재가, 그들의 죽음이, 국가의 기념비에 새겨진다는 것은 오히려 각각의 전쟁 경험이 ‘국민’과 ‘인간’의 경험으로 뭉뚱그려져 평균화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공적(功績)이나 피해를 인정받아 국가가 세운 기념비에 이름을 새기고 공식적인 추도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넘어서는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까?
베트남전쟁의 윤곽은 더욱 다양한 층위의 분석틀 속에서, 더 많은 전쟁 경험을 말하고-듣고-기록하고-전달하는 장(場) 속에서, 또한 그러한 장을 통해 겪은 자와 겪지 않은 자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생성되는 물음들과 함께 가까스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은 이런 물음들 속에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글은 2024년 8월 29~30일 518국제연구소에서 열린 518국제포럼 ‘기억, 기념, 연대의 미래’와 제67회 전국역사학대회 ‘전쟁과 평화’에서 발표한 원고를 보완·수정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동물, 난민, 여성, 가해자성을 키워드로 화성외국인보호소 방문시민모임 ‘마중’, 번역공동체 ‘잇다’,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팀, 아카이브 평화기억에서 공부하고 활동한다. 동료들과 함께 실천적인 앎과 삶의 길을 내는 데 관심이 있다. 최근의 공저와 논문으로는 『폭력에 대항하는 법-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언어, 기억 그리고 연대』(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24), 『군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남성성 #젠더 #퀴어 #동물 #AI』(서해문집, 2024), 『수용 격리 박탈-세계의 내부로 추방된 존재들/동아시아의 수용소와 난민 이야기』(서해문집, 2024)이 있고, 「지금-여기 페미니스트의 서경식 다시 읽기-젠더적 관점으로 고마쓰가와 사건과 식민지주의를 묻다」(『사이間SAI』 37호, 2024)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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