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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 굴리기』는 콜렉티브 ‘손과얼굴’의 두 작가 강정아, 정혜진이 2023년 일본 파라다이스 에어 레지던시에서 진행한 작업 과정을 담은 아트북이다. 손과얼굴은 2014년 결성한 콜렉티브인데, 프로젝트에 따라 강병우, 손나예, 송재연, 임기오가 참여하는 유연한 협업의 형태를 지향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모국어 굴리기』는 동명의 전시가 지난 7월 서울 종로구 포에버 갤러리에서 진행되었으며, 이 책은 전시를 보충 혹은 확장하는 가능성을 품고서 전시장에 함께 비치되었다. 나는 일정상 직접 방문할 수 없어 전시를 보지는 못했지만, 대신 이 책을 통해 모국어 굴리기 프로젝트의 또 다른 형태를 경험했다. 전시가 영상 상영과 퍼포먼스, 벽에 걸린 액자와 바닥에 놓인 설치 작업, 작가와의 대화 등 여러 매체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책은 『모국어 굴리기』라는 프로젝트의 앞뒤에서 머무른 여러 사유들을 몇 장의 이미지와 다수의 짧은 텍스트들로 엮고 있다.
작업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글과, 작업을 보여주는 부분적인 기록의 결합인 이 책은 전시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시 또한 부분적인 정보들의 나열이고 그것을 관객이 얼마나 충실히 혹은 여백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그 경험은 압축적일 수도, 느슨할 수도 있는 매체이다. 그렇기에 전시를 보지 않고도 『모국어 굴리기』의 리뷰를 쓸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접고, 책으로만 가능한 이 작업의 감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전시장에 입장하듯, 책의 첫 페이지를 함께 넘겨보자.
글자를 ‘데구르르’ 굴립니다
연분홍 바탕에 하얀색으로 ‘ROLLING MOTHERLAND’라는 제목이 적힌 표지를 넘기면, 간단한 소개글을 지나 독자를 위한 몇 개의 주석을 읽을 수 있다. 그중 단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 번째 주석이다.
“본문은 한국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일본어로, 일본어에서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언어의 배열 순서는 원문이 쓰인 언어를 기준으로, 번역이 이루어진 순서를 따릅니다. 이러한 다단계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의도나 뉘앙스가 일부 유실되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각 언어권의 감각과 사고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모국어 화자의 관점에서 의미와 어조를 살려 번역을 진행하였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이 책의 글자들이 모두 세 개의 덩어리로, 세 개의 언어로 흘러가고 있다. 아니, 굴러가고 있다. 나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영어를 배웠고 일본어를 부분적으로만 읽을 수 있기에, 일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의 변화와 유실을 알아챌 수 없다. 한국에서 출판된 책이기에 나처럼 누군가는 일본어를, 영어를, 혹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읽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책 속에 놓인 세 개의 글자들은 완벽하게 제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리저리 굴러가고 흩어진다. 분명 이 책은 읽지 못하는 글자를 경험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감각하게 하려는 것 같다. 글자가 자꾸만 달아나는 책 바깥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실감을 공유하며 다시 모이게 될까.
달아나는 글자들을 놓치며 페이지를 계속 넘기다 보면, 모국어 굴리기 프로젝트의 시작이 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손과얼굴의 두 작가가 일본 지바현에 위치한 마쓰도에서 지내던 짧은 기록이다. 도쿄 근교의 소도시인 마쓰도는 외국인이 거주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곳으로, 최근 베트남, 태국, 중국, 필리핀 등 이주민들이 많아지는 추세이지만 예전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두 작가는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저녁 식사는 늘 외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고향이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낯선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고향을 그려나갈수록 고향의 얼굴은 서로 닮아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으며, 고향을 떠난 이들의 얼굴은 언어의 부재에서 오는 혀끝의 진동, 혀가 글자를 굴리기 위해 애쓰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낯선 타지인 마츠도에 머물렀던 두 작가가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구사하며 느꼈던 어려움과도 닮아있었다.
두 작가는 두 무력함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먼저 주목하며 글자를 굴리는 감각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을 이어간다.
“그 모습은 때로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또는 안간힘으로 쇠똥을 굴리는 쇠똥구리처럼, 데굴데굴 글자를 옮기는 한 사람 ‘글자를 굴리는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글과 글 사이에서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시시포스(Sisyphus)』와 작자 미상의 이집트 고대 벽화 『태양을 들어 올리는 태초의 신(Nun Raises the Sun)』이 삽화로 등장한다. 두 작가가 보기에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기 위해 혀를 굴리는 동작은 거대한 바위를 계속해서 산꼭대기로 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시포스의 행동, 그리고 자신보다 커다란 똥을 굴려 집에 묻는 쇠똥구리의 행동과 닮아있다. 이때 고대 이집트어 케페레르(Kheperer)는 ‘쇠똥구리’ 그리고 ‘생성과 재생’이라는 의미를 둘 다 갖고 있으며, 고대 벽화 속에서 쇠똥구리는 태양을 운반하며 이집트의 태양의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글자를 굴리는 행위는 집을 향해 돌아가는 끝나지 않는 여정처럼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자신을 만들어가고 머무를 곳을 찾아가는 고유한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글자를 굴리면 굴릴수록 새로운 언어가 밀려 들어오고 그에 따라 익숙했던 모국어는 지워지는 것만 같지만, 잃어버린 것은 몸 안에 흔적으로 남아 그것을 되찾고 다시 잃어버리는 끝없는 집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두 작가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숙명적인 움직임을 공유하기 때문에 어딘가 닮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곳
이제 읽던 페이지를 잠시 덮고 이 책의 옆면(책배: 책등의 반대편, 책이 열리는 부분)을 살펴보길 제안한다. 하얀 책배 사이로 색이 입힌 영역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이미지가 많이 들어간 영역이 페이지 상에서 한군데에 모여 있는 것이다. 손과얼굴이 일본에서 진행했던 인터뷰와 그것으로 만든 작업, 오픈 스튜디오, 워크숍, 전시를 기록한 부분이다.
다시 책을 열어 이 부분을 찾으면, 가장 먼저 두 작가가 마츠도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향에 대해 인터뷰했던 기록이 스캔 이미지로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손 글씨로 적힌 일본어, 중국어, 영어, 한국어 글자들은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가늠되지 않지만 무엇보다 번역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독자는 다시 한번 ‘읽을 수 없음’의 감각과 마주한다. 페이지를 넘기는 눈은 그저 각각의 짧은 글들이 고향을 떠올리며 서술한 생각들이라는 점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읽을 수 없기에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책 속에 삽입된 큐알 코드는 집의 풍경을 감각하게 하는 소리로 독자를 안내한다. 큐알 코드를 따라 사운드 클라우드에 저장된 『당신을 집에 데려가는 목소리』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곧 가벼운 종을 치는 듯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고향의 기억을 회상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사이로 노랫소리, 그리고 나지막하게 기차 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한다.
이 책의 독자들이 모국어에만 의존하는 무력함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 책이 만난 이방인들은 낯선 언어 환경 속에서 모국어에 의존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경험하고 있다. 굳이 무력함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두려움’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이동과 떠남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목소리가 품은 다성성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길 독자에게 제안한다.
‘집이 없다’는 감각들이 차이를 인식하고 서로를 볼 때
목소리들은 하나로 만나지만, 다시 흩어진다. 집을 떠난 이들의 얼굴은 과연 모두 닮아있을까? 글자를 모두 읽어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은 어떤 글자에서도 안정감을 찾을 수 없는 무력감과 결코 같을 수 없다.
파라다이스 에어 레지던시의 코디네이터 하루카 우에다는 손과얼굴에게 보낸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를 따라. 운 좋게 운을 만나. 집에서 쫓겨나서. 강제퇴거를 당해서. 추방당해서. 팔려나가서”, “전쟁으로. 인종말살로”, “이방인이 되어버려서. 외부인이 되어버려서. 생각했던 것보다 잘 살아남아서” 집을 나서고 집으로 귀환한다. 우리는 누구나 집을 떠나고, 누구나 머무르던 곳에서 이동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가 같은 상실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 노마드(nomad, 유목민)의 삶이 만들어내는 낭만적 노스탤지어를 경계하며, 이 책의 중후반부에 이어지는 여러 편의 에세이는 바리데기, 파독 근로자, ‘환향년’ 등 외부의 폭력에 의해 집을 떠난 여러 주체들을 언급하며 집 없음의 감각에 섬세함을 더하고 있다.
이 책은 글자를 굴린다는 감각, 누구에게나 자신이 존재하는 곳은 언젠가 떠날 곳이며, 누군가 이미 떠난 곳의 흔적이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것을 출발점 삼고 있다. 하지만 타인과 나의 경험이 공유할 수 있는 추상성으로 확장되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시작이 될 뿐이다. 나의 상실감과 타인의 상실감은 하나의 목소리로 만날 수 있지만, 한편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다성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때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타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강정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고정된 점처럼 보였던 것이, 실은 끝없이 회전하며 나아가는 나선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해방을 느낍니다.” 직선이 아니라 점차 넓어지거나 좁아지는 비정형의 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나선형의 시간 감각은 현재라는 점 위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경험이 과거와 미래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무수히 많은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선형으로 나아가는 집의 길은 타인이 잃어버린 것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여러 서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책을 덮으니 뒷표지에 태극권 도복을 입은 한 인물의 손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앞표지와 비슷한 색감의 분홍색 도복 위로 열 개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을 붙잡고 있는 듯하다. 두 작가는 마쓰도에서 김춘화라는 분을 만났다. 조선족인 김춘화 선생님은 이십 대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현재 일본에서 외국인들에게 일본어와 태극권을 가르친다. 매일 아침 태극권을 수련하던 김춘화 선생님의 손끝에서 두 작가는 그곳이 어디든 자신이 뿌리내리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몸짓을 보았다. 김춘화 선생님의 두려움, 상실감, 흔들림, 떠남과 돌아감의 여정은 두 손으로 모은 보이지 않는 중심 속에서 여전히 나선형으로 나아가고 있다.
손과얼굴이 일본에서 김춘화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모국어 굴리기』라는 다성적 목소리를 만들었듯, 관객 그리고 독자들 또한 집이라는 단어에서 흔들림을 감각하길, 그리고 그 균열을 다른 이의 균열과 마주 보며 채워가기를 바란다. ‘집’이라는 감각을 둘러싼 여러 모국어의 흔적들 속에서 읽지 못하는 것들, 놓치는 것들, 무력함을 느끼는 것들을 차례로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타인과의 여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 소개] 전솔비. 시각문화 연구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난민캠프라는 현장을 만나며 〈연약한 기록들의 춤〉(신촌문화발전소, 2022), 〈캠프 사운드 커뮤니티〉(웹사이트 http://campsoundcommunity.com 2023)를 함께 만들고,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2024)라는 책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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