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노인’도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위한 노력〈에이징 위드 프라이드〉 대만, 독일, 네덜란드 성소수자 노인과 복지“돌봄 시설(요양원 등)로 입소하는 (성소수자) 노년층의 70% 가까이가 다시 ‘벽장으로’ 들어가 정체성을 숨기게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성소수자 인권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에서 온 얀 데르크선-윈(Jan Derksen Wynn) 씨의 말이다. 2001년 세계에서 최초로 동성혼을 법제화하며 혼인평등 사회를 만든 네덜란드에서 왜 노인 성소수자는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벽장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고립, 외로움, ‘다시 벽장으로’... 성소수자 노년이 겪는 어려움
지난 10월 26일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에이징 위드 프라이드(Aging with Pride): LGBTQ+의 나이듦, 돌봄 그리고 커뮤니티’ 포럼이 열렸다. 네덜란드에선 ‘핑크 50+’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얀 씨가 참석했는데, 50세 이상 LGBTIQ+ 노년층을 위한 단체이다. (공식 명칭: Stichting Roze 50+ Nederland)
독일에선 ‘루비콘 rubicon’의 안드레아 보테(Andrea Bothe) 네트워크 코디네이터, 대만에선 LGBTQ+ 핫라인 협회의 정 즈웨이(鄭智偉) 사회복지국장, 그리고 한국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캔디 활동가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각 국가의 성소수자 노년층이 겪고 있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하거나 추진 중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대만, 독일, 네덜란드는 모두 동성혼이 가능하며,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논의와 활동이 한국보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로서 ‘나이든다’는 것은 이들 나라에서조차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고, “갈 길이 먼” 미지의 영역이다.
이들 국가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전하며, 한국 사회가 참고할 수 있는 점들을 짚고자 한다.
“성소수자 노년층은 취약한 집단”∙∙∙해결하려면 갈 길이 멀다
네덜란드의 얀 활동가는 “통계청 조사에서 당신을 ‘비(非)이성애자’로 정체화하느냐는 질문에, 인구의 18%가 그렇다고 답하고, 95%의 네덜란드 사람은 ‘성소수자가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금 더 세부적인 질문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전히 “인구 중 34%가 ‘바이섹슈얼(양성애)은 ‘지나가는 단계’일 뿐, 혹은 ‘결정을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intersex, 여성/남성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성징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선 부정적 태도가 약 10%로, 열명 중 한 명”이다.
얀 활동가는 특히 “성소수자 노년층은 취약한 집단”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의 삶의 역사는 ‘일반’ 인구와 다르다. 네덜란드에서 동성애자 인권 해방 역사는 고작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인권이 아직도 완전한 평등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그는 또 “돌봄 시설에 들어가는 성소수자 노년층의 약 70%가 다시 ‘벽장 속으로’ 들어간다.”면서 이것은 “성정체성을 숨기게 된다는 의미이고, 돌봄 시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성소수자 노년층은 병원, 의료진에게 충분한 이해를 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전히 전립선암에 걸릴 수 있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의사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과대, 간호대 교육 과정에서 LGBT 관련 교육이 고작 1시간 정도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충분치 않다.”고 덧붙였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노년층이 거의 보이지 않아 젊은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워
독일은 남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형법 175조가 1994년에 폐지되었고, 레즈비언인 엄마의 양육권을 박탈하는 규정이 1993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변경을 위한 강제 불임수술 조건이 2008년에 폐지되는 등 제도의 변화가 있어 왔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소수자 정체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높고, 차별로 인한 실직이나 경력 단절로 인해 소득도 낮다.
독일에서 온 안드레아 활동가는 “특히 레즈비언 여성의 노년 빈곤 위험이 높으며, 성소수자의 우울증과 번아웃은 비성소수자에 비해 3배 많고, 외로움을 느끼는 비율은 2배 높다.”고 설명했다.
대만의 즈웨이 활동가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노년층이 거의 보이지 않아, 젊은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라 짚었다. “몇 년 전 커뮤니티 내에서 ‘안락사’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응답자의 90%가 안락사에 찬성했다.”며, 이는 “성소수자로서 노년의 삶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더 쉬운 선택으로 여기는 경향”이라고 분석했다.
이 세 나라 활동가가 이야기한 공통된 성소수자 노인의 어려움은 1)성소수자에겐 혈연 가족보다 ‘선택된 가족’에 의존하게 되며, 그 관계망이 붕괴되면 외로움과 고립이 심화된다. 2)소수자 정체성으로 인한 사회생활의 어려움, 경력 단절 등으로 빈곤 위험이 높다. 3)불안과 우울 등 정신 건강 이슈 4)돌봄 시설로 들어가게 됐을 때 다시 직면하는 ‘커밍아웃’ 문제 등이다.
“노년 성소수자를 보이게 하고,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야”
이런 문제를 각 국가는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가? 일단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나이듦, 노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만 LGBTQ+ 핫라인 협회은 무려 20년 전인 2005년부터 ‘노년 성소수자 소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즈웨이 활동가는 “‘늙음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관계와 삶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사용하며, 노년 성소수자를 보이게 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걸 목표로 했다.”고 설명했다.
즈웨이 활동가는 “노년 성소수자를 모르고, 만나지 않은 채 노년 성소수자를 위한 정책 제안이나 지원 활동을 한다면, 상상 속 노년 성소수자에 근거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실제 노년 성소수자의 삶과 역사, 생애 경험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자를 찾는데 1년이 걸릴 정도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노년 남성 동성애자 인터뷰를 담은 『무지개버스』(2010), 이후 노년 여성 동성애자 인터뷰를 담은 『할머니의 여자친구』(2020)를 출간하는 성과를 만들었다.
한편, 독일 퀄른에 위치한 단체 루비콘(rubicon)엔 ‘골든 게이즈’, ‘골든 걸즈’, ‘실버 트랜스’를 비롯한 12개의 노년 관련 소모임이 있다. 안드레아 활동가는 “이런 그룹 활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엔 아침 식사 모임도 열어, 만날 가족이 없는 이들에게 공동체 공간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노년층을 위한 가장 큰 행사는 모두와 마찬가지로 ‘프라이드’ 기간이다. 루비콘은 이 기간 중 3일 동안, 노년 성소수자가 편안하게 모이고 만나는 공간을 운영한다. 이 때 우리가 외치는 구호는 ‘우리의 자유에는 역사/선배가 있다!’이다. 퍼레이드 당일 노년의 성소수자가 리어카를 타고 등장하면 관중들이 환호하며 함께 축하한다.”
또한 연극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안드레아 활동가를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공유하며 게이는 레즈비언의 삶을, 레즈비언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공연으로 제작해 요양시설에서 공연한다. 이는 더 많은 사람에게 ‘우리 커뮤니티’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라 전했다. 이외에도 요양등급을 신청하는 방법, 공동주거 등에 대한 워크숍도 진행한다.
무지개 노년층에게 ‘연결’과 ‘함께함’은 가장 중요한 요소
네덜란드의 얀 활동가는 “우린 LGBTIQ+ 노년이라는 말 대신 ‘무지개 노년’이라는 말을 쓴다. 왜냐면 이게 훨씬 쉽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그런 ‘무지개 노년’의 가시화는 네덜란드에서도 쉽지 않다. 얀 활동가는 네덜란드 남부 지역의 큰 농촌 지역에서 사는데, 이곳의 인구는 약 9만3천명이다. 네덜란드의 인구 18%가 비이성애자로 정체화한다는 답변을 이곳에 대입해 보면 꽤 많은 무지개 인구가 있어야 하지만, 얀 활동가가 아는 무지개 노년은 30명 정도 뿐이다.
많지 않은 숫자지만, 이들은 모여 ‘핑크살롱’이라는 소모임을 운영한다. 당사자와 지지자가 함께 모여 커피나 차를 마시며 여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얀 활동가는 “때때로 아주 깊은 토론을 하기도 한다.”며 “공동체가 지향하는 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무지개 노년층에게 ‘연결’과 ‘함께함’은 가장 중요한 요소”라 강조했다.
의료 사회복지 분야에 교육과 감사 진행해 ‘무지개 친화적인’ 기관임을 인증
단체들은 커뮤니티 내부 활동에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정부와 지자체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정부와 지자체도 그에 협력한다. 네덜란드의 ‘핑크 50+’는 정부와 보건복지부의 보조금 지원을 받고 있다.
이 곳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핑크 패스키”(ROZE LOPER)다. 단체는 의료 및 사회복지 분야에서 LGBTQ+ 친화성을 나타내는 이 마크를 해당 기관(주거 요양시설, 재택 요양시설, 장애인 단체, 사회복지 기관, 정신건강 시설, 병원)에 제공한다. 이 마크를 획득하기 위해선 단체의 감사를 통과해야 한다. 단체에선 해당 기관의 이사회 및 의료진 뿐만 아니라 청소 및 주방 직원, 시설 관리팀 등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교육 및 감사를 진행한다. 얀 활동가는 “이를 통해 ‘무지개 친화적인 기관’으로 인증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작은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예를 들어 시설 입소 서류에 ‘나는 기혼이다.’라는 표현을 ‘나는 파트너가 있다.’로 변경하는 거다. 이는 작은 변화지만 중요한 거다. 이렇듯 변화는 작고 세밀한 것들의 연속이다. 이것이 모여 전체를 바꿀 수 있다.”
얀 활동가는 홍보대사로서 더 많은 기관이 이 “핑크 패스키”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을 한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약 1,500개의 요양시설(Nursing home)이 있는데, 이 중 286개 시설이 “핑크 패스키”를 획득한 상황이다.
얀 활동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하면서도 희망을 내비쳤다. “인증을 받는 기관은 벽에 커다란 인증서를 걸어둔다. 이것엔 또 다른 긍정적 효과가 있다. 기관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이라는 게 알려지면 직원 확보가 훨씬 더 쉬워진다. 현재 요양 분야는 극도로 인력이 부족한 상황인데, 이주민 노동자들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독일, 대만 역시 복지·장기요양 내 성별다양성이 잘 반영되도록 노력
독일 또한 비슷한 인증 제도를 운영 중이다. ‘루비콘’에서도 “다양성 인증 기관”(Place of Diversity Certification) 지정에 참여할 수 있고, 이 인증을 받은 기관은 지역의 LGBTQ+ 단체와 협력할 의무가 생긴다.
안드레아 활동가는 “이런 복지기관에서 현재 LGBTQ+ 커뮤니티를 위한 11개의 아파트(요양시설과 일반 주거시설의 중간 단계)를 제공 중”이라 밝혔다. “입주자들은 그곳에서 매우 편안함을 느끼며, 함께 공동체 모임을 진행하는 등 좋은 통합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대만의 LGBTQ+ 핫라인 협회는 사회복지·장기요양 체계 내 성별다양성이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 중이며, 장기요양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진행 중이다.
오랜 세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억압을 견디며 살아온 ‘무지개 노년’의 삶은 변화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비가시화되어 있고, 때때로 고립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고자, 그들의 삶을 지지하고자, 세계의 여러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한국의 ‘무지개 노년’들은 어떤 삶을 보내고 있을까? 한국 사회 또한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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