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우리가 여성으로서 물려받은 것들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사하르 칼리파 소설 『유산(The Inheritance)』

유스라 | 기사입력 2025/12/05 [10:50]

유산, 우리가 여성으로서 물려받은 것들

[청년 페미니스트, 내 머리맡의 책] 사하르 칼리파 소설 『유산(The Inheritance)』

유스라 | 입력 : 2025/12/05 [10:50]

[필자 소개] 유스라(Yousra Feriel)는 알제리 출신의 작가이자 청년 활동가로, 현재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서 함께 활동하며 미디어 프레이밍과 젠더 기반 온라인 폭력, 시민 사회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랍 페미니스트 작가의 책을 찾기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건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찾는 일이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이 바로 팔레스타인 작가 사하르 칼리파(Sahar Khalifeh)의 『유산(The Inheritance)』(도서출판 아시아, 송경숙 옮김)이다. 칼리파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삶을 단순히 ‘점령의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사랑, 정치, 가부장제 사이에서 복잡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을 그려낸, 팔레스타인 문학의 대표적인 목소리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다.

 

▲ 팔레스타인 문학의 대표적인 목소리이자 페미니스트 작가 사하르 칼리파(Sahar Khalifeh), 1970년대에 촬영된 사진. Photo: Palestinian Museum Digital Archive (Jerusalem Times Archive), Item 139308. URL: palarchive.org


이 소설에 끌린 이유는 칼리파가 공적인 이야기와 사적인 이야기를 함께 엮어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점령에 맞서 싸우면서도, 팔레스타인 사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가부장적 전통을 솔직하게 비판한다. 민족 해방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또 여성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으로서 두 정체성을 함께 껴안은 것이다.

 

식민지배와 독립의 역사를 가진 알제리에서 자란 나에게 이 책은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작가가 느꼈던 분노, 실망, 후회, 슬픔이 내 안에도 있었다. 알제리와 팔레스타인 사회는 여성에게 순결과 순응을 강요하는 방식이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주인공 자이나(Zayna)는 미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아버지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그러나 이곳에 완전히 소속되지는 못한다. 가깝지만 멀리 있다. 이해하면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그가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안에 있으면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시선이다.

 

누구나 인식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관찰하게 된다. 자이나도 그랬다. 끊임없이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 애쓴다. 그녀의 관찰은 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처럼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자각은 언제나 외로울 뿐이다.

 

그녀의 정체성은 복잡하다.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 여성으로 구분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서구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로 보인다.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다. 사실, 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식민의 역사를 기반으로 세워졌고,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저항의 역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이나에게 페미니즘과 민족 해방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엄을 지키는 일은 결국 하나의 싸움이다.

 

▲ 팔레스타인 페미니스트 작가 사하르 칼리파(Sahar Khalifeh)가 1997년에 출간한 소설 『알-미라트(al-Mirath)』 표지 이미지와, 한국어 번역서 『유산(The Inheritance)』(송경숙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 2009) 표지 이미지.


여성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 소설의 배경은 오슬로 협정 이후의 서안지구이다. 평화를 약속했던 협정은 일상의 통제로 바뀌어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귀향의 희망을 품고 돌아왔음에도,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불평등과 억압으로 가득했다.

 

우리/독자는 자이나를 통해 다양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자이나가 아버지의 마을을 방문하며 만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먼저 나흘라(Nahleh). 쿠웨이트에서 평생을 일하며 남동생들의 학비를 감당했던 그녀는 걸프전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늙었고’, ‘너무 독립적이며’, ‘쓸모없는 여자’가 되어 있다. 그녀는 “그들은 나를 레몬처럼 짜내고 버렸다”라고 말한다.

 

푸트나(Futna)는 자이나 아버지의 일곱 번째 아내로,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 이스라엘 병원에서 인공수정을 택한다. 그러나 군사 검문소로 막힌 길 위에서 진통이 시작되었고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길 위에서 아이를 낳으며 세상을 떠났다. 점령과 혼란 속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개인적인 일조차 이스라엘 군사점령의 통제 아래 있음을 상징한다.

 

사미라(Samira)는 라말라에 사는 교육받은 여성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사회의 시선과 감시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감옥에 갇힌다. 루카이야(Ruqayya)는 기독교 여성으로, 무슬림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점령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를 이교도로 바라보고 혼인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경계 때문에 끝나 버린다.

 

이 여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온 존재들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만, 그 속에는 피로와 강인함, 그리고 고요한 생명력이 함께 흐른다.

 

푸트나가 출산하며 사망한 이후, 이스라엘 점령군의 검문으로 길이 막혀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던 그 자리에서, 곁에 있던 싯 아미라(Sitt Amira)가 갓난아이를 이스라엘 점령군에게 안기며 말하는 장면이 있다. “고맙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의 몫입니다.”

 

그 한마디에 절망과 분노, 냉소가 다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은 나에게 너무 익숙했다. 알제리에서도 봐왔던, 모든 것을 잃고도 여전히 견뎌야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 2024년 3월 세계여성의날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여성 해방 없는 팔레스타인 해방 없고, 팔레스타인 해방 없는 여성 해방 없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들. (필자 제공)


우리가 물려받은 것들

 

『유산』을 읽으며, 나는 알제리 여성으로서 내가 물려받은 것들을 떠올렸다. 수치심, 억눌린 분노, 그리고 두려움. 이 책은 나의 페미니즘 관점을 바꾼 건 아니지만, 식민 이후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결을 더해주었다. 해방의 정치와 여성의 존엄에 대한 투쟁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결이다. 식민의 잔재와 사회 내부의 가부장제는 같은 뿌리에서 반복되며, 어느 하나만 해결해서는 진정한 해방이 올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 책은 해답을 주려는 책이 아니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짊어져 온 무게를 인식하게 만든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분노를 물려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존재 그 자체가 급진적이며,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항이 된다.

 

칼리파의 자기 사회 비판은 어떤 이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 솔직함이야말로 작품을 진실하게 만든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가부장제가 식민 권력에게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성평등 없는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는 방향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여성의 경험이 언어와 거리를 넘어 얼마나 서로 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서로의 삶은 다르지만, 여성의 고통과 인내, 그리고 ‘나’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어디서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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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비 2026/01/02 [12:39] 수정 | 삭제
  • 연대의 마음 보냅니다.
  • 친구들 2025/12/07 [13:13] 수정 | 삭제
  • 팔레스타인 페미니스트 작가의 소설이라니 너무 귀하다. 한국에 더 많은 아랍여성들의 기록들이 소개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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