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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사이에 사회복지학계를 비롯하여 정책 논의의 여러 장에서 ‘돌봄’이 키워드가 된 것은 분명 뚜렷한 추세이다. 돌봄과 관련한 강의나 발표, 토론 등의 일정이 많아졌다.
최근에 받았던 요청은 “공공돌봄에서 제외된 목소리 중의 하나”로 성소수자 단체의 의견을 토론으로 발표해달라는 것이었다. 돌봄 중심의 복지국가를 위한 정책 과제가 주제발표였고, “공공돌봄의 확대 방향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소수자” 단체들의 의견을 담은 토론이 이어졌다. 주최 측의 기획은 당사자 단체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직접 듣겠다는 측면에서 한 발짝 진전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돌봄을 국가 주도의 방식으로 환원하고 돌봄자와 돌봄필요자를 이분화하여 정책 대상으로 납작하게 열거하는 주류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벗어나 있음의 소수자’가 일방적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특정한 취약성을 가진, 어떤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 그 자체인 ‘정책 대상’으로 상상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국가가 호명하는 수동적인 타자로서 응답하는 토론이 아니라, 제도 밖, 국가의 ‘보호없음’의 위치로 내몰리는, 소위 생산성과 정상성의 위계에서 낮은 자리에 배치된 소수자들, 퀴어, 트랜스젠더, 장애인, 여성, 이주민, 탈가정 청소년, 난민, 노숙인, 가난한 사람들 등 다양한 주체들과의 연대 속에서 교차적 관점에서 ‘돌봄 부정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입장임을 밝혔다. 이 입장은 바로 〈연대와 돌봄의 법〉 보고서에서 일관되게 견지한 관점이기도 하다.
최근의 돌봄 논의는 가족과 서비스의 영역을 넘어 사회구조를 바꾸는 급진적인 정치철학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돌봄은 젠더 불평등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비장애주의 등과 교차하여 우리의 삶을 재생산하는 토대까지도 먹어치우는 ‘식인 자본주의’(낸시 프레이저 저, 장석준 역, 『좌파의 길: 식인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2023) 사회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재생산을 넘어, 행성 차원에서 공동의 삶의 조건 자체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태적 전환의 기획과도 연결된다.
돌봄은 단지 보편화되어야 한다기보다 타자들의 정치학으로 열리며 공동의 사회성을 새로 구성해가는 사회 변혁의 정치적 기획으로 모색되고 있다.(고윤경, “생산으로서의 돌봄:사회적 재생산을 넘어 ‘함께-다르게-되기의 노동’으로”, 『여/성이론』 49호. 2024)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돌봄 사회로의 전환’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특정한 돌봄’의 사회였다는 점을 마주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전환’이 가능하려면 운동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집중시킬 누빔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돌봄으로부터 과감히 돌아서야 하는가?
국가는 무임금의 젠더화된 돌봄을 가족의 마땅한 역할로 강조해왔고, ‘의존’을 나쁜 것으로 낙인 찍으며, 돌봄을 무능력하고 취약한 집단에 대한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도움으로 격하해왔으며, 저비용의 효율적인 돌봄시장 시스템을 계층화되고 인종화된 돌봄노동으로 채우며 확대해왔다. 인구소멸의 위기론을 심화하면서 인구정책으로서 돌봄 정책을 귀속시키고, 법으로 규정된 소위 ‘정상가족’만을 지원하는 가족정책과 ‘아동과 노인, 장애인’을 ‘취약집단’으로 규정하는 시혜적인 돌봄 정책을 동전 앞뒷면처럼 시행해왔다.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권리’를 일탈로 간주하는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가부장적 가족돌봄과, 이를 대리하겠다고 나선 국가의 소위 ‘감금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시설돌봄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 돌봄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돌아섬을 시작할 수 있을까?
‘가족과 돌봄’은 매우 사적인 영역의 단어로 보이지만, 아주 정치적인 단어이자 묶음이다. 가족에게 돌봄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문장처럼 발목을 잡는 운명적인 족쇄이기도 하지만, 어떤 ‘가족’에게는 돌봄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돌보는 일상이 가시화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법과 정책을 통해 혈연과 이성애 혼인에 의한 가족만을 정상화하고 물적 기반과 특권을 지속하도록 해왔기 때문이다. 이 협소한 법적 ‘가족’을 호명하는 법은 무려 240개나 되며 일상생활 전반을 세세하게 아우른다.(김현경·나영경·이유나·장서연, 『이슈 발굴 및 논의를 위한 N개의 공론장 연구보고서: 법이 호명하는 가족의 의미와 한계』, 가족구성권연구소, 2019)
많은 사람들이 법을 넘어 유대감을 느끼는 친밀성의 관계, 서로 돌보며 같이 살아가는 관계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얘기한다.(여성가족부, 『다양한 가족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EMBRAINPUBLIC. 2020) 하지만 가족 구성의 자연적 조건으로 간주되는 이성애 결혼과 출산, 혈연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가족뿐만 아니라 ‘시민’의 자격에 대해서도 의심받는다. 법 밖의 ‘가족들과 관계들’이 마주하는 차별과 배제는 출생에서부터 교육, 돌봄과 의료, 주거와 노동, 죽음과 애도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에서 생애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 생애 과정에서 실천하는 다양한 관계들과 돌봄의 시간들, 유대와 결속이 단지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화되고, 심지어는 불온한 것이 된다.
“나중에”의 불의함이 아닌, “그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는!”
퀴어/성소수자들, 그리고 연대하는 많은 소수자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를 지키기 위한 광장에 언제나 있었다. 12.3 계엄 이후 “윤석열의 탄핵과 퇴진을 위해, 내란을 멈추고 평등한 내일을 열기 위해”서도 무지개 깃발 아래 광장을 지키며 함께 행진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과 투쟁의 시간을 딛고 ‘국민주권정부’라는 별칭을 달며 출발한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국민이 주인이 나라, K- 민주주의”에서 호명되는 ‘국민’은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국민/시민’의 호명이 모순적일 수 있을까? 법 밖의 비시민으로 내몰리며 소수자들의 삶과 돌봄이 불능화되는 차별적 조건들은 ‘사회적 합의’라는 기만적 술책에 의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가족구성권 3법 등의 제정”, “민법 779조와 건강가정기본법의 폐지” 등은 ‘광장의 힘’으로 출발한 이 정부에서 아직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이주, 장애, 계층, 연령 등의 분할선을 따라 차별하며 돌보거나, 돌봄 받지 못하게 만드는 법과 제도들을 바꾸는 것, 모두가 돌보고 돌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평등과 연대로서의 돌봄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법 제정이 많은 차별을 한 번에 해결하는 만능키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기본적인 방안임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법과 정책이 변화의 디딤돌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돌봄, 인권, 정의, 연대와 같이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실현해주지는 않는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인권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인권도시를 자처하면서 ‘인권’의 단어는 실로 넘쳐나지만, 현실은 그런 장밋빛과는 여전히 거리가 크다는 것도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정말 많이 달라질까? 수많은 질문과 모색이, 좌충우돌과 협상이, 후퇴와 반론과 진전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사람들의 실천과 변화에 또 다른 새로운 장이 열릴 것으로 예견된다. 분명한 차이점은 “차별금지법이 있어서!”라는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누군가를 뒤로 남겨놓는 “나중에”는 명백한 차별이며 불의이다. ‘주인’이라는 화려한 미사여구로 꾸며진 ‘국민’의 호명 뒤에, 남겨진 사람들로부터 ‘돌봄의 정의’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 중심 사회와 불화하는 문란한 존재들로 규정되어온 퀴어/소수자들은 존재와 관계, 돌봄 모두 삭제되고 주변화되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되기, 관계맺기, 존재하기를 가시화하며, 이성애 규범적 가족제도를 넘어서 친구, 동료, 이웃, 공동체가 서로의 돌봄 주체가 되는, 새롭게 발명하는 “퀴어 친족을 만들며” 살고 있다.(김순남·나영정, “퀴어생존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실천으로서의 돌봄: 게이 남성을 중심으로”, 『가족과 커뮤니티』 제10집, 2024)
‘돌봄의 퀴어링’은 오랫동안 이성애중심의 가족주의,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비장애주의와 생산성 중심의 능력주의 등 ‘정상성’의 틀에서 작동해온 돌봄을 해방시킨다. 또한 가족의 사적인 자원이 아닌, 나아가 시장에서 구매하는 서비스가 아닌, 퀴어한 비친족적이고 비규범적인 관계로부터 만들어지고 생산되는 자원으로서 돌봄은 공동체의 공동 자원이 된다.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공동체 자체를 뜨개질하는(knitting) 급진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물질적 자원의 공동 분배와 공유를 넘어서, 연대와 돌봄의 관계를 공동으로 생산·재생산하며 세계를 새롭게 형성해나가는 운동으로서 돌봄의 커머닝(communing)은 국가나 법,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 ‘우리 몫의’ 실천영역이다. 이는 그 누구도, 비인간의 존재조차도 뒤에 남겨두고 가지 않겠다는 ‘가장 느린 정의’를 향해가는 것이다. 그 길에서 아프고 병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를 발견하고 보살피며 의존하며 살아남고 살아남도록 돌보고 또 돌보는 데 실패하며 집단적인 접근성/돌봄망을 만드는 모든 시간을 뜻한다.(리아 랍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저, 전혜은‧제이 역, 『가장 느린 정의: 돌봄과 장애정의가 만드는 세계』. 오월의 봄, 2024. 옮긴이 해제에서)
‘난잡한 보편적’ 돌봄이 실천되는 그 모든 장소에서 요청되는 권리들은 공동의 목표가 된다. 2021년, 영국 연구자·활동가 집단인 ‘더 케어 컬렉티브(The Care Collective)는 돌봄에 대한 상상력을 친족 단위, 공동체, 국가를 넘어, 지구의 가장 ‘낯선’ 지역의 가장 먼 곳까지 확장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난잡한 돌봄”을 포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퀴어-페미니즘-반인종차별주의-생태사회주의의 연결되고 교차된 정치적 비전으로서, 직접적인 돌봄노동뿐만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 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고 공동으로 책임지고자 하는 “보편적 돌봄”을 제안하였다.(『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전소영 역, 니케북스)
“가족 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는 관계가 유지되고 지지될 수 있도록, 인구정책의 도구가 되지 않는 인권으로서의 주거의 권리, 취약성을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거나 가족에게 내맡겨지지 않고 돌봄 받는 사람의 주체성과 자기결정권이 중심이 되는 돌봄받을 권리와 돌봄할 권리, 공동생활을 하고 서로를 돌본다는 이유로 오히려 사회적인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이들을 비롯, 시민의 자유로운 결속을 보장하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 돌봄과 연대가 가능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는 노동의 권리, 성적 억압과 정상성 규범이 만드는 차별과 배제에 도전하는 성적 권리, 모든 젠더폭력 피해자가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 건강의 기준을 질문하며 다양한 몸-마음으로 지역사회에서 노동하고 참여하며 소외되지 않고 살아갈 권리,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숨겨지지 않고 존엄하게 태어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원하는 사람과 함께 애도받을 수 있는 권리.”
이 권리들은 법률로 정하는 ‘권리 목록’으로,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권리가 아니다. 이는 수행적인 실천이며, 어떤 삶의 조건에 대한 공유이자 참여로서의 권리이다. 인간 모두에게 평등에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는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의 의미가 인식되고 공유되고 언명되면서 새롭게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집단적인 실천에서 출현하며 감각된다. 가족과 돌봄, 사회적 재생산을 퀴어링하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을 통해 규범적인 시민모델, 정상성의 삶의 모델을 해체하고, ‘뒤에 남겨진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평등과 연대로의 돌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연대와 돌봄의 법] 연재시리즈(첫 기사 링크 https://ildaro.com/10180)의 마지막 편이다. HIV감염인 파트너로서 서로를 돌보았던 성진이, 달팽이집에서 세입자 정체성에 프라이드를 가졌던 청년들이, 찜방이라는 낙인의 공간에서 서로를 위로했던 게이들이, 노동력으로 환원시키는 힘에 맞서 삶을 일구는 이주민들이, ‘보호대상아동’에게 돌봄의 역량을 빼앗는 제도에 맞서고, 장애인에게 돌봄의 능력이 없다고 믿는 사회에 맞서며,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고 실패하는 과정을 서로에게 허락한 트랜스젠더들이 만들어낸 울퉁불퉁한 결들이, 동질적이지 않은 돌봄과 친밀성과 연대의 지형들이 계속 발견되고 발명되길 바란다. 이 고유한 삶의 장소들이 은폐되지 않고 드러나고 연결되면서, 온전히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적 재생산의 지도로 펼쳐지기를 고대한다.
[필자 소개] 성정숙. 사회복지연구소 물결의 공동대표로,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와 『가족신분사회』를 함께 작업하였다. 주류의 사회복지 이론과 실천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앎과 질문하기를 통해 ‘사회복지의 젠더링, 퀴어링’을 꿈꾸며, 최근에는 돌봄을 ‘지구행성에서 함께 살아감’이라는 존재론적 물음으로 사유하며 새로운 유대와 결속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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