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전혀 다른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추억〉

변규리 | 기사입력 2026/05/13 [09:21]

나와는 전혀 다른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추억〉

변규리 | 입력 : 2026/05/13 [09:21]

정치적 신념이 인간관계에서 ‘불화’로 작동하는 경험을 나 또한 해 보았다. 어쩌면 매순간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작게는 오늘 내가 일하는 사무실 안에서부터, 현재 세계곳곳에서 발생하는 참극까지. 정치적 신념의 대립은 부모와 자식 관계도, 우애도, 신의도, 깊은 역사도 그리고 사랑까지 뒤흔들기도 한다.

 

▲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시드니 폴락 감독, 1973년)의 두 주인공. 능력 있고 잘 생긴 미국 주류 남성인 허블(로버트 레드퍼드)과, 반전 운동을 하며 정치적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여성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사랑과 갈등을 다루며 치열한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영화 〈추억〉이 남긴 질문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1973)은 서로의 정반대에 있다고 생각하는 케이티와 허블이라는 인물이 사랑을 느꼈고, 최선을 다해 나와 다른 너를 사랑한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연기한 ‘케이티’라는 인물의 매력에 대해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치열함에 대해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영화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거침없는 성격의 케이티와 해군 장교로 활동 중인 허블이 어느 클럽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재회 후, 이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른 주제곡과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한다. 영상은 현재의 모습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과거로 전환한다. 여기서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구현해낸 케이티와 허블의 캐릭터 대비를 볼 수 있다.

 

▲ 영화 〈추억〉 중 케이티와 허블의 모습


둘은 뉴욕의 코넬 대학교에서 만난 동창생이다. 허블은 잘생긴 외모에 ROTC, 체육 특기생으로 육상, 조정 못 하는 게 없다. 자신의 활동을 응원하는 여자친구와 박수쳐주는 사람들까지. 세상은 중산층 미국인인 그에게 관대하고, 주위의 관심을 받는 일이란 그에게 ‘쉬운’ 일이다. 반면, 케이티는 곱슬머리에 멋진 옷은 커녕 알바에 매달려 사는 짠내 나는 대학생이지만 세계 평화를 꿈꾸는 열혈 운동권이다. 세상은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방관하지 말자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을 주목하지 않는다. 학내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관심이 아니라, 조롱거리가 된다.

 

너무나 상반된 둘이지만, 이들은 대학이라는 한 공간에서 한 시절을 함께 하고 있다. 같은 세계, 같은 공간,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수업을 듣더라도 이들이 사는 모양은 너무 다르다. 그 극명한 차이를 이 영화는 실감나게 묘사한다.

 

계급과 삶의 조건이 전혀 다른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매료되어 무언가를 깨닫고 성장한다는 설정은 흔한 로맨스의 공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신박할 정도로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시대적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주인공들의 삶의 태도를 묘사함에 있어, 그들 사이의 긴장을 정밀하고 팽팽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그 치열한 시대적 묘사들이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구현된다는 지점이다.

 

▲ 영화 〈추억〉 중 케이티의 모습


케이티와 허블이 대학에 함께 다녔던 시기는 1930년대 후반으로 스페인 내전이 있던 시기다. 케이티는 학내 집회에서 스페인 내 학살에 더 이상 방관하지 말자는 연설을 하지만, 돌아오는 건 학생들은 야유뿐이다. 그때, 군중 속에서 함께 비웃고 있을 줄 알았던 허블이 의외의 진중한 시선으로 케이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서 용기를 얻은 케이티는 마침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쏟아내는 데 성공한다.

 

허블의 의외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케이티는 작문 시간, 자신의 글이 우수작으로 뽑히길 고대하지만 정작 선택된 것은 허블의 글이었다. 교수가 낭독하는 허블의 문장을 들으며 케이티는 허블의 글에 매료된다.

 

과거의 회상이 끝난 뒤, 영화는 케이티가 허블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잘생긴 얼굴, 천부적 재능, 세상의 관대함까지 업은 허블이 관계의 주도권을 쥔 듯 하지만, 사실 관계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은 케이티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한 그녀의 기질은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녀에게 허블의 사회적 배경은 중요치 않다. 케이티의 신념과 삶의 태도가 주로 불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케이티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둘은 만날수도 없었다. 사랑의 위기마다 케이티가 어떻게 돌파구를 찾는지를 지켜보게 되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다.

 

한편, 허블은 케이티를 만남으로써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허블이 할리우드 데뷔를 꿈꿀 때, 케이티는 그의 재능이 왜곡될 것을 경계하게 된다. 둘을 이어주었던 ‘글’은 결국 검열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 놓이게 되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계기가 된다.

 

▲ 영화 〈추억〉 중 케이티가 워싱턴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


이 시기의 사회적 배경이 되는 1940년대 후반, 냉전 체제가 시작될 무렵 미국 사회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매카시즘(McCarthyism)의 광풍에 휩싸인다. 할리우드 역시 사상검증을 피할 수 없었다.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 침투를 조사하며 증언을 강요했으나, 이 증언을 거부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할리우드 10인’이 등장하던 그때, 케이티는 망설임 없이 워싱턴 시위를 주도하고, 합류한다. 이제 막 할리우드 데뷔를 꿈꾸는 허블에게 그녀의 정치적 행위는 부담이었으나, 케이티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허블은 그 일로 인하여 데뷔가 막히는 위기의 국면에 닥치자, ‘저항 없이’ 글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한다. 시대의 검열은 그렇게 둘을 갈라놓는다. 그러나 케이티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허블을 잡는다. 그녀에게 신념을 지키는 것과 허블을 사랑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블은 그럴 수가 없다.

 

수 년 후, 두 사람은 또 다시 우연히 재회한다. 케이티는 여전히 거리 선전전을 향하는 길이었고, 허블은 TV쇼 작가로서 파트너와 함께 뉴욕을 방문 중이었다. 둘은 재회의 순간, 나와는 전혀 다른 너를 사랑했던 그때를 추억한다. 그리고 한 세계에 존재하면서도, 사랑하면서도,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제 받아들인다. 그래서 케이티는 거리에서 다시 외친다. 원자폭탄 반대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말이다.

 

[필자 소개] 변규리: 관찰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 왔고, 그 습관이 발전해 다큐멘터리라는 툴을 탐구하게 됐다. 지역공동체 라디오 구로FM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며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2016년 퀴어 페미니스트 미디어 그룹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큐가 더 좋아졌다. 다큐는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공동의 경험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세상에 미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에서 집행위원으로도 함께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Play On〉(2017 연출), 〈너에게 가는 길〉(2021 연출)이 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컨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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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 2026/05/23 [13:57] 수정 | 삭제
  • 재회 장면에서 눈물이 나는데 이유를 딱 찝어말할 수 없으나 다들 비슷한 마음일 거 같아요.
  • 당근 2026/05/14 [12:58] 수정 | 삭제
  • 케이티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둘은 만날수도 없었다. 이 문장 좋다.
  • 이십오 2026/05/14 [10:43] 수정 | 삭제
  • 매카시즘 다룬 영화인 걸로는 알았는데 케이티라는 인물 캐릭터가 진짜 매력적일 것 같네요.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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