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그림으로 대화하기

엽기발랄한 여자 이수경

최이윤정 | 기사입력 2004/02/29 [19:18]

쿨하게 그림으로 대화하기

엽기발랄한 여자 이수경

최이윤정 | 입력 : 2004/02/29 [19:18]
화가 수경, 그녀를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은 건, 개인적으로 술자리를 몇 번 하면서 그녀의 일상과 작업 모두 한번쯤 일다 독자들과 소통하면 좋겠다는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그녀의 작업실에서 마셨던 데킬라 때문인지, 그녀의 작업실은 무척이나 친숙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화가’라고 말하려니 너무 틀에 박힌 딱딱한 느낌이 들고, 뭔가 다른 말로 그녀를 표현할 만한 말이 없을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소개 받길 원하느냐고 질문했더니, “가볍고 엽기발랄한 여자”가 좋단다. 이건 그녀가 좋아하는 타이틀이자,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말할 때 사용하는 수식어다. 또 그녀의 작업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품은 ‘가볍다’. 그런 가벼움에 대해 작가로서 고민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주변에서는 위험하다고 하기도 하지만, 지금 하고 싶은 게 그건데 안 하면 나의 표현의 자유가 제한당할 것 같은데 어쩌냐”고 말한다.

“실은 나 원래 가벼운 사람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진지한 편이에요. 그런데 작업까지 진지하면 안될 것 같아서… 그런 점에서 많이 가벼워지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막상 작업에선 진짜 가벼운 모습이 많이 나와서 나도 신기해요. 내가 갖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인 것 같아요.”

(놀랍게도) 한국화가 전공인 그녀는 100장 중 1장을 건지는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작업을 거쳐 스피디하게 작업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나는 쉽고 빨리 작업하는 게 좋아요. 그런 걸 보여주는 기계라고 할 수 있죠.” 표현 방식에서 자유로운 그녀는 미술인의 시선이나 인식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으로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이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움’으로 변장(?)을 꾀하고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그녀의 작품 전시에서 인상적인 점은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려고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에 이야기가 필요하죠. 내 작품엔 항상 이야기(story)가 있어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주가 되죠.”

이야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업을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엔가 관객과의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는 걸 느꼈어요. 그림이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림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회화성을 배제하고, 이야기를 통해 관객이 친숙하고 쉽게 볼 수 있게 만들고 싶어졌죠. 다행히 관객들이 그런 점을 좋아하는 것 같고.”

관객이 알아서 찾아오도록 하는 게 아닌, 관객에게 먼저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태도에 다소 놀랐다. 그런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작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일상적으로도 작업실에서 문하생들과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그들의 경험을 통해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인간관계에 대해 알게 되죠. 그런 것들이 내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그림이 만화책이나 드라마처럼 대중들에게 무리 없이 읽혀지길 바라는 그녀는 지난 전시회에서 그 바램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얘기들>이란 주제의 개인전에서 그녀는 ‘텍스트’를 작품감상의 보조장치인 동시에 작업의 일부로써 가져왔다. 그 얘기들 속에는 사회에 던지는 냉소와 비꼼에 대한 익살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그녀의 작품엔 또한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작가 자신의 솔직함이 묻어나 있다. 자신의 삶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관해 고민되는 것들이 담겨있는 것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관심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전시 준비할 당시에는 여자라고 피해 의식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되게 강했어요. 약한 척 하는 여자, 이런 모습 보면 분개했으니까. 어떤 친구는 내 작품을 보고, 강한 여성만을 여성이라고 인정한 게 아니냐고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냥 생각이 흐르는 대로 그릴 뿐이에요.”

사람, 얼굴, 빨강과 초록

그녀의 그림엔 유독 사람 얼굴이 많이 보인다. “사람 얼굴엔 표정, 기분이 있잖아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굳이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래서 어떤 상황을 사람 얼굴로 많이 그리게 되는 것 같아요. 손, 발에도 표정이 있어요. 예를 들어 방향을 가리킨다든지 하는. 차갑거나 슬프거나 하는 것들이 손, 발에도 나타나죠.”

빨강과 초록을 많이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더니, 자신의 그림이 단순하고 드로잉선이 많기 때문에 보색이 잘 어울린다고 한다. “가장 반어적인 표현이 보색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명시성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건 작업 자체가 어떤 비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죠. 그런 점에서 노랑-남색 보색은 명시성이 크지만, 그건 너무 세련되고 깔끔하단 말이에요. 약간 촌스럽기도 하면서 어울리는 보색이 빨강-초록인 것 같아요. 내 작품이랑 잘 맞는 것 같아.”

<자학기계- 킬킬킬, Kill Kill Kill>

3월 1일부터 한 달간 신촌 ‘몽환’에서 열리는 그녀의 세 번째 개인전은 <자학기계>다. 이번 컨셉이 좀 튀지 않냐는 말에, “원래 <페티시즘>으로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원래 강한 남성편력이 있거든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죠”라며 웃는다.

“그런데 그때 실연을 당해서 도저히 이걸로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작업과 일상이 떨어지면 작업이 잘 안되거든요. 헤어진 상처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이걸 작업으로 풀 수 없을까 생각을 하게 됐죠. 통쾌하고 스스로 편하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래서 생각해낸 게 자학시리즈였던 거예요.” 자신의 아픔을 작품의 전면에 드러내는 방법이라니, 자학도 아닌 자학기계가 나오기까지 이런 맥락이 있었구나!

자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신적인 자학을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서, 육체적인 자학으로 바꿨어요. 그래서 생각했던 게 ‘좋아하는 여자의 발 냄새를 맡는다’ 이런 건 어떨까 했지요. 좋아했던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데, 발 냄새를 맡는 순간 어떻게 보면 되게 깨는 거잖아요? 지금 내가 좋아하는 민정호나으리(대장금에서의 지진희 분)같은 애의 발 냄새를 맡으면 난 되게 싫어질 것 같거든요.”

“또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은 간지럽히면 화를 낼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웃고 있는 거에요. 그런 육체적 자학을 하면서 정신적 자학을 순간 잊게 만드는 거죠. 마조히즘도 일종의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얘기만으로도 기발하고 엽기적이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그것을 엽기와 웃음으로 통쾌하게 풀어가다니, 그녀는 벌써 작업을 하면서 상당히 치유가 돼가는 듯했다.

그녀의 자학 시리즈에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많이 녹아나 있다. 예를 들어, <선인장>은 친구의 경험인데, 선인장에 찔려서 한달 동안 선인장 가시를 뽑았다는 얘길 듣고 작업한 거란다.

“나의 작업은 일상이에요”

실연을 겪은 후에도 부지런히 전시를 준비할 수 있는 그녀. 그녀의 이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올까 궁금했다. “모든 생활을 한 곳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렇죠. 나는 작업을 일상생활처럼 해요. 어떤 예술인들은 술 마시고 담배피고 몸 망가지면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벼락치기로 몰아붙여서 작업하는 스타일도 있기도 한데, 나는 그렇진 않아요. 규칙적으로 작업실 와서 문하생들 가르치고 그 외의 시간엔 대부분 내 작품 구상을 하거든요. 하루에 드로잉을 5장 이상씩 그려요. 그런 게 다 작품에 도움이 되고.”

벌써 5월에 있을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 그녀. 다음 컨셉은 <가수 앵앵이 양의 삶과 죽음>이란다. 만화 컨셉으로 풀어가는 이번 작품들은 ‘앵앵이’라는 한 여가수의 일생을 통해 사회에 대한 세태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 여성의 유품(죽었으니까)과 연재물을 통해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앵앵이’라는 이름은 “가장 조악하고 천박한 말이 없을까 하다가 생각해냈다”며, “실은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일상이 작업인 그녀. 작업을 안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그래서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그녀. 그림을 안 그리고 전시를 안 하면 삶이 무료하다는 그녀는 짧은 호흡으로 관객들과 자주 만나지만, 계속 변화하는 자신과 그리고 그것을 바라봐줄 사람들과 길~~게 만나길 원한다. 이런 그녀를 ‘화가’라는 말로 부르기 보다는 이렇게 불러 보는 게 어떨까. ‘쿨하게 그림으로 대화하는 여자, 수경’이라고.

www.tnrod.com(수경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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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1962 2005/10/14 [16:49] 수정 | 삭제
  • 사랑하는 사람의 발냄새는
    그를 사랑하는한 발냄새가 아닌 발향기로 승화된답니당 ^^
  • pascal 2004/03/06 [00:29] 수정 | 삭제
  • 엽기발랄...
    작품들도 좋구...
    재밌네요.

    저두 시간되면 전시장에 찾아가볼라구요..
  • 개나리 2004/03/01 [22:59] 수정 | 삭제
  • 다 읽고나니 수경님 작품들이 더 보고싶어져서 홈페이지도 구경다녀왔습니다.
    자학시리즈로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다니 멋지고 유쾌하네요.
    작품들도 특이하고 재밌어요. 다.
    신촌에서 한다는 전시회 잘 되길 바랄게요. 실연의 아픔을 다 극복하시기를. ^^
  • 뮤즈 2004/03/01 [12:04] 수정 | 삭제
  • 일다 인터뷰 기사는 편하게 다가오는 게 매력이에요.
    이수경씨 인터뷰 보니까 그림도, 이야기도 재밌네요.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춤 잘 추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도 부러웠지만.
    지금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가장 부러워요.
    자학이라는 컨셉도 흥미를 돋구는 주제네요.
    신촌이면 가까운데 전시회도 함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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