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들’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 성소수자를 말하다

이허린 | 기사입력 2004/03/21 [22:00]

[기고] ‘그들’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 성소수자를 말하다

이허린 | 입력 : 2004/03/21 [22:00]
교회 안에서 성소수자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혹시 진보적인 교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되더라도 성소수자는 ‘그들’이 된다. 간혹 성소수자에 대해 두둔하는 목회자의 주장을 듣더라도 십중팔구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작 자신들, 자신의 주변인들을 성소수자 범주에 넣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 동성애자가 있다는 사실 또한 생각하지 않는다. 성소수자는 있어서도 안 되는 존재고, 혹 관용을 베푼다 하더라도 '나의 현장'에는 있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이며 성소수자인 나는 정체성을 숨겨야만 한다. “성소수자들인 ‘그들'을 이해하며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성소수자라는, 보이지 않는 죄의 짐을 짊어진 나에게 구원의 사건이 다가왔다.

제13회 여성신학포럼에 참석했을 때다. 일본의 한 목사님께서 인사를 하셨다. "우리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 곳에는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함께 있습니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성소수자를 두둔하던 사람들도 교회의 한 자리에,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 동성애자가 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일본 목사님은 바로 ‘이 자리’에 ‘우리’가 다양한 모습으로 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당신의 옆에 동성애자가 있다고 말이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 교회 안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그들'의 범주에 있었던 존재가 드디어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소수자에 대한 열린 마음을 재일한국인의 발제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민족적, 인종적, 계급적, 연령적,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해방을 요구하고 그 차별을 극복하는 것은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리스도 이해의 출발이며 선교의 과제다.”

이 짧지 않은 문장 속에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받는 사람”이라는 어구를 발견하고는 나는 다시 한번 뜨끔해졌다. 우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성적 지향'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쓸 수 있는 경우를 본적 있던가. 내가 교회에서, 또는 신학교에서 성소수자라는 혹은 동성애자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쓸 수 있을까. 만약 쓴다 하더라도 ‘우리의’ 이름이 아닌 ‘그들의’ 이름으로 바꾸어 쓰진 않을까.

일본 목사님의 반가운 인사에, 그리고 재일한국인의 발제에 무어라 답변의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를 아는 한국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를 드러내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고 교회 안에서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동성애자라고 밝히지 못하고 대신 그저 성소수자에 대해 관심 있는 일반사람인 척 가장해, 성소수자를 ‘그들’로 밀어내지 않고 ‘우리’로 긍정한 그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나 역시 껍질을 벗고 온전히 내 존재가 긍정되는, 그리고 진정 '우리'가 될 수 있는 그 때가 온다면 다시 그분들을 만나 당당히 내 이름을, 내 존재를 드러내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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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 2004/03/22 [18:06] 수정 | 삭제
  • 그 느낌 이해할 것 같습니다. ^^
    절절한 표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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