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가수들

한국 여성음악인 재조명-9

주문정언 | 기사입력 2004/04/25 [20:31]

뮤지컬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가수들

한국 여성음악인 재조명-9

주문정언 | 입력 : 2004/04/25 [20:31]
3분 남짓 되는 노래만으로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는 가수들이 있다. 그래서 화려한 유명세를 뒤로 한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보여줄 수 있는,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을 택한 가수들이 있다. 사실 그들이 브라운관을 떠난 순간 많은 이들이 그들을 잊어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보여주는 극장 무대 위 에너지 넘치는 모습은 그들이 고작 몇 인치의 텔레비전 화면위에만 고여 있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1988년 전수경이 MBC 대학가요제에서 ‘말해’로 내뿜듯 노래하며 동상을 받았을 때, 임상아가 ‘뮤지컬’을 부르며 보여준 화려한 퍼포먼스를 볼 때, 이재영이 막달라 마리아로 소개되며 ‘유혹’을 부르던 관능적인 모습을 볼 때, 우리 입에서 나온 감탄사는 뮤지컬 배우로서 그들이 가진 기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열정적인 막달라 마리아, 이재영

1990년 즈음 ‘유혹’이라는 노래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말 그대로 ‘매혹적’인 가수 이재영을 기억하는가. 당시 매체들이 이재영을 소개할 때 ‘혜성처럼 나타난’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이재영은 연극영화학을 공부하며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노력을 쏟길 마다하지 않았다.

1988년 이상은이 ‘담다디’로 대상을 받을 당시의 9회 강변가요제 기념 앨범을 보면 이재영의 곡과 사진을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내 젊음 목이 말라요’라는 곡으로 본선 진출을 했다. 그러다 주목을 받은 것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막달라 마리아 역이었다. 이후 이재영은 ‘유혹’으로 데뷔하기까지 쾌속행진을 한다. '유혹‘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노래의 야릇한 분위기뿐 아니라 이재영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을 ‘유혹적인 분위기’까지 함께 기억할 것이다. 이재영은 또 ‘사랑은 유행이 아니야’등을 가요 프로그램의 순위권에 진입시켰다.

1992년에 2집 앨범을 발표했지만 인기 면에서는 1집보다 저조했다. ‘실루엣’이나 ‘집시’처럼 1집 히트곡 ‘유혹’과 비슷하게 만들었지만 그처럼 이미지 메이킹이 잘 된 곡이 딱히 나오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 2집 앨범엔 지금의 이재영을 짐작하게 하는 곡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의 꿈’이라는 곡이다. <인형의 집>이란 소설을 기본으로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이재영의 뮤지컬 가수다운 역량을 보여주는 곡이다. 이 노래는 경쾌하고 드라마틱한 멜로디가 지금도 사랑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안타까운 곡이다.

1996년 발매된 3집을 대변하는 곡이라면 ‘대단한 너’다. 흔한 분위기의 곡일 수도 있는 강력한 절정부를 가진 댄스곡이다. 당시에는 이와 유사한 분위기의 ‘스톰’ 등 몇몇 곡들이 있다 보니 크게 주목 받진 못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아는 애창곡이 되었다. 또 ‘유혹’에서 ‘나의 꿈’, ‘대단한 너’로 이어지는 이재영의 여정을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금 뮤지컬 배우로서의 이재영이 다져온 기반이다.

1997년 윤복희와 함께 다시 호흡을 맞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막달라 마리아 역할, <그리스>, <레미제라블> 그리고 2000년의 <브로드웨이 42번가>, 2002년의 신상옥, 최은희와 함께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마리아 역을 이재영이 맡았다. 가수로서의 가창력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냐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2002년 또 다른 뮤지컬 <록키 호러 쇼>에서 당당히 그런 구설수를 떨쳐냈다. 그는 이 뮤지컬에서 처음 제의가 들어온 여주인공 쟈넷을 굳이 사양하면서 자신이 꼭 하고 싶은 배역인 마젠타를 선택했다. ‘Science Fiction, Double Features'라는 곡을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재영이 그 동안 해 온 일들은 상당히 학구적이고 음악적이었다. 2003년에는 신문방송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학위 논문으로 <뮤지컬 수용자의 공연선택 행위와 수용형태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자신의 분야에 열정적인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이재영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10년 남짓 활동하고 나니 방전된 배터리 같았어요. 아직 충전이 끝나지 않았고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에서 우러나는 노래를 할 수 있을 때 음반을 내야죠.”

전수경을 빼고 한국뮤지컬을 말할 수 없다

1988년 무한궤도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동상을 받은 열정적인 여대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 뮤지컬 배우로 알려진 전수경은 ‘말해’로 이 해 대학 가요제의 동상을 받았고, 텔레비전 무대에서도 사랑 받던 명랑하고 털털한 이미지의 가수였다. 사람들은 그가 토해내듯 부르던 ‘말해’를 듣고 시원하게 노래하는 가수로 그를 기억했고, 혹 나이든 어르신들은 드세 보이는 여자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끼가 넘치던 매력적인 가수였다. 사람들은 그가 독집 앨범을 낼 거라 기대했지만, 전수경은 어느 날인가 뮤지컬을 하겠다고 덤벼들더니 이름 없는 조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뮤지컬에만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지금 그의 뮤지컬 이력을 모두 열거하기란 짧은 지면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브로드웨이의 유명 롱런 뮤지컬들의 한국 공연은 대부분 전수경을 거쳤다. <키스 미 케이트>, <시카고>, <넌센스2>, <98브로드웨이 42번가>, <아가씨와 건달들>, <그리스>, <라이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이 그것이다.

1997년의 3회 뮤지컬 대상 여우조연상부터 1999년 <라이프>로 5회 뮤지컬 대상 여우주연상, 2002년 <키스 미 케이트>로 8회 뮤지컬 대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바의 히트 곡들을 모은 뮤지컬 <맘마미아>를 성황리에 끝냈다. 그러나 화려한 전력 외에도 전수경을 대단하다고 평할 수 있는 이유는 성공 이전에 그가 걸어온 길 때문이다.

당시 대학가요제 수상자라는 이름을 통해 전수경은 가수나 연기자 혹은 개그우먼이나 MC 등 여러 길을 택할 수 있었다. 뮤지컬 판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오직 뮤지컬 하나에만 매달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때만 해도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전문적으로 분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선희를 비롯한 가창력 있는 가수들조차도 뮤지컬에 매력을 느껴도 선뜻 뛰어들진 못했다. 그러나 전수경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건 말건 미친 듯이 뮤지컬에 빠져들었고, 이젠 그를 빼놓고서 한국의 뮤지컬을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뮤지컬 무대 위 전수경의 모습에선 만만치 않은 그의 이력이 함께 묻어난다.

10년 약속을 던지고 간 뮤지컬 디바, 임상아

1996년 김현철의 5집 <동야동조>의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듀엣을 한 여자가수의 이름이 ‘임상아’라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임상아는 가수가 아닌데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SBS 특채로 <야망의 불꽃>으로 데뷔한 임상아는 그 이후 <남자 대탐험>과 더불어 <출발 모닝 와이드>, SBS <콘서트 음악세상> 등에서 MC를 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마음이 고와야지>, <복수혈전> 등 드라마에 활발히 출연했고 2000년 <형제의 강>을 끝으로 뮤지컬 유학을 떠났다.

임상아의 뮤지컬 이력도 만만치 않아서 <아가씨와 건달들>, <넌센스>, <이수일과 심순애>, <스타가 될거야> 등 몇 편의 뮤지컬에도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또 워낙 다재다능한 데다가 미모였고 성격도 활발해 주변에선 음반을 만들자는 권유도 많았고, 임상아 자신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섹소폰이나 하모니카 등 악기를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무용을 전공 했다는 이점도 있었다.

김현철과의 듀엣 이후 나온 1996년 임상아의 독집 앨범에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뮤지컬’이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도 ‘차라리’나 조덕배의 곡을 리메이크 한 ‘나의 옛날 이야기’등이 사랑 받았다. 1997년에는 박진영과 손을 잡은 2집을 선보였고 ‘저 바다가 나를 막겠어’라는 역시 뮤지컬적인 색채가 짙은 곡을 발표했다. 1998년의 3집에서는 다시 ‘뮤지컬’의 주영훈과 손잡고 ‘부메랑’을 타이틀 곡으로 위시해 지금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주제곡으로 쓰이는 ‘TV는 사랑을 싣고’와 홍수철의 곡을 리메이크한 ‘장미빛깔 그 입술’ 등을 불렀다.

임상아의 재능은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뮤지컬’과 ‘저 바다가 나를 막겠어’, ‘부메랑’으로 이어지던 세련되고 화려한 창법과 퍼포먼스, ‘나의 옛날 이야기’와 ‘장미 빛깔 그 입술’에서 볼 수 있는 리메이크 곡을 자신의 색깔로 완벽히 소화해내는 재능, 또 그러면서도 어딘가 재즈적 역량을 엿보이는 면모 등은 임상아가 조금만 더 단련된다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재능을 가진 탓인지 이것저것 구설수도 많았고 급기야 연예계 생활이 힘들고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유학 길에 오르게 됐다. 2000년 미국 유학을 가면서 임상아는 뮤지컬을 제대로 공부해 오겠다며 10년 목표를 세웠다 했다. 많은 팬들은 그가 돌아올 2010년을 기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또 다른 구설수들과 결혼설, 그리고 무산된 헐리우드 진출설 등은 임상아의 복귀가 불확실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주었다. 단지 하나 확인된 사실은 지금 임상아는 결혼을 했고 출산준비로 바쁘다는 것이다.

몇 번 선뵈지 않았음에도 임상아의 무대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 노래를 맛깔스럽게 부르면서도 백댄서들과의 군무에서 단연 돋보이는 세련된 몸짓들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이 임상아의 매력이고 재능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명 작곡가들이 임상아에게 앞 다투어 곡을 주고 프로듀싱을 하려고 했던 이유일 것이다. 임상아의 재능은 아직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임상아가 십 년의 유학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임상아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멋지다고 얘기해 줬는지 모른다. 십 년의 시간 동안 임상아가 아끼지 않을 노력과 그것들을 펼쳐 보일 컴백무대를 생각하면 설레기 때문이다.

뮤지컬이 화려해 보이는 이유는 그 뒤에 숨은 치열한 노력 때문일지 모른다. 이들이 좁은 텔레비전 무대에 안주하지 않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험난한 곳으로 뛰어든 것은 자신의 열정과 재능의 소리에 정직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된다. 그저 한 순간의 외도일 수도 있을 것이고 좋은 경험으로 남겨도 좋을 법했지만 전수경, 이재영, 임상아는 뮤지컬을 통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주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들의 노래가 즐겁고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 길을 걷기 위해 그들 스스로 고난을 택한 ‘용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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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ndow 2004/04/26 [12:50] 수정 | 삭제
  • 정말 매력적이었죠.
    꼭 다시 돌아와야 할텐데..

    기사 보면서 또 생각하게 된 건데요.
    뮤지컬 무대에 한 번 서면 그 매력을 못 잊나봐요.
    굶어가면서도 무대를 지키면서 사는 배우들이 여전히 많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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