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워커,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영혼

<사랑의 힘>과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4/05/24 [01:15]

앨리스 워커,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영혼

<사랑의 힘>과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

김윤은미 | 입력 : 2004/05/24 [01:15]
몇 년 전 우연히 앨리스 워커의 소설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를 읽었을 때 인상적이었던 점은 여러 가지 억압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흑인여성의 문제를 쉽고 간명하게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전달보다는 ‘호소’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은 정서적인 부분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면에서 대중적인 종교 서적을 읽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는 흑인여성 타쉬의 몸에 가해진 끔찍한 할례의 고통과 그녀가 할례로 인한 트라우마(외상,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적 기억과 싸우는 처절한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타쉬의 고통과 상처에 매몰되지 않는다. 작가는 타쉬의 문제를 강제로 타 대륙으로 이주 당한 후 성차별, 인종차별,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흑인여성 집단의 역사적인 문제로 연결시키고, 그녀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억압에 반대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소설 전반에 걸쳐 드러낸다.

독자들은 역사가 보여주는 (백인남성들의) 폭력성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삶을 살아온 여성들의 생명력을 한없이 믿고 그녀들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정서적인 힘, 약간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영적인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세계가 대부분 우리의 ‘아들’, ‘형제’, 그리고 ‘아버지’에게 할당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내 어머니의 끝없는 반영이기도 한 어두운 여성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 스스로 얻어진 자생의 힘으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앨리스 워커의 에세이집 <사랑의 힘> 역시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사랑하면 구원 받는다니, 자칫하면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 없는 상업적인 휴머니즘으로 오해 받기 쉬운 소제목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면, 앨리스 워커가 말하는 사랑과 구원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에세이 역시 소설처럼 매우 쉽게 읽힌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차별 당해온 흑인여성의 역사가 그녀의 글을 통해 묵직하게 전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메시지를 쉽게 지울 수는 없다.

앨리스 워커는 정통 기독교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이 냉혹하게 자신들의 선조인 이교도와 종교가 없는 자들의 땅을 뺏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모든 사람은 그들을 존중해주는 신을 숭배할 자격이 있다”고 단언한다. 오랫동안 노예로,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후에는 소작농으로 고달프게 살아왔기에 흑인들은 종교에 기댔지만, 정작 백인남성들이 제시한 종교는 흑인들과 여성들을 존중하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에서 다룬 여성할례 문제의 경우 그녀는 할례를 반대하는 대회에 참여해서 할례 당한 여성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은 경험을 서술하면서, 할례에 대해 “일상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무심한 공격”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그녀는 할례와 같은 여성 폭력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폭력에 무심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진저리 나는 고통 속에 있는 한 우리는 태초부터 스스로에게 부여된 역할, 즉 주위의 환경을 돌보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앨리스 워커는 인종차별, 성차별 등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과 억압을 비판한다(그녀는 백인여성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성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는 ‘우머니스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바 있다). 그녀는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차별이, 성차로 인한 남녀차별과 유사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문명에 의한 자연파괴와도 이어진다고 본다. 때문에 그녀의 글에서는 흑인여성과 자연이 함께 연결되어 나타나며, 여성성에서 어떤 본질적인 영성을 구한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저자의 인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 인식이 살면서 만난 수많은 흑인여성들에 대한 그녀의 경험들이 남긴 통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를 살아내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받아 유지하기 위한 나의 투쟁일 뿐 아니라 현재를 껴안고 미래를 위해 싸우기 위한 투쟁을 대변한다.” 때문에 앨리스 워커가 전하는, 호소하는 듯한 강력한 메시지들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어떤 본질적인 여성성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투쟁해 온 여성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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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 2008/12/17 [19:14] 수정 | 삭제
  • 앨리스 워커도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글로리아 스테이넘이 오면 그녀가 백인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것처럼, 앨리스 워커가 오면 그녀가 흑인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것처럼 선전하는 게 싫더군요.

    특히 딜레마님 식으로 이야기해버리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합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이나 레즈비언 이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의 이론과 접목시키기도 하고, 비판도 했습니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고 미국과는 다른 문화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들을 우리가 상세히 접하고 이해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면 우리 식으로 하겠지요. 흑인 페미니스트도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여성들을 두고, 전체 흑인을 대표하듯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앨리스 워커. 지난 번 방한한 글로리아 스테이넘보다 훨씬 더 훌륭한 평을 받고 있는 페미니스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그러나 그녀의 주장이 미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어떤 논쟁을 일으켰는지, 그게 한국에서는 어떻게 유효한지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방한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한국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져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단 페미니스트들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지만. 한두 명의 유명한 페미니스트들과 만나는 게, 그들이 경험하고 논쟁한 사회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 바람 2004/05/29 [11:15] 수정 | 삭제
  • 앨리스 워커도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글로리아 스테이넘이 오면 그녀가 백인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것처럼, 앨리스 워커가 오면 그녀가 흑인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것처럼 선전하는 게 싫더군요.

    특히 딜레마님 식으로 이야기해버리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합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이나 레즈비언 이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의 이론과 접목시키기도 하고, 비판도 했습니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고 미국과는 다른 문화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들을 우리가 상세히 접하고 이해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면 우리 식으로 하겠지요. 흑인 페미니스트도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여성들을 두고, 전체 흑인을 대표하듯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앨리스 워커. 지난 번 방한한 글로리아 스테이넘보다 훨씬 더 훌륭한 평을 받고 있는 페미니스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그러나 그녀의 주장이 미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어떤 논쟁을 일으켰는지, 그게 한국에서는 어떻게 유효한지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방한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한국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져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단 페미니스트들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지만. 한두 명의 유명한 페미니스트들과 만나는 게, 그들이 경험하고 논쟁한 사회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 딜레마 2004/05/25 [22:05] 수정 | 삭제
  • 여성단체활동가와 여성주의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즉 서구적 페미니즘은 좀더 여성단체와 같은 이익단체적인 의미가 짙습니다.
    예로 미해병 사관생도 입문에 관한 남녀성차별에 대해 반기를 들었죠.
    이것은 남녀의 능력차별을 거론하며 꽤나 당시의 언론에 찬사를 받아가며 이슈화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반전주의를 망각한 사실상의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로 벌이는 힘의 논리에 입각된 외교정책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하나의 참여정책일 뿐이라는 사실이죠.헥헥
    흑인여성주의는 백인주도하에 자행되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강렬히 비난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클린턴 정부하의 여성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의 의사를 표시했죠.
    이것이 그들이 갖는 한계입니다.
    우리나라도 그와 같은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예가 바로 삼사사관생도의 입문에 대한 성차별주의도 그와 같은 예입니다.
    그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군대란 집단에서 여성이 배제될 이유는 무엇이냐 그에 대한 하나의 차별에 대한 돌파구였다.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말하는 반전주의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군대폐지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한다는게 드러납니다.
    현 자본주의가 갖는 한계만 말하게 됩니다.즉 그들이 말하는 논리란
    안보(대표적으로 군대)는 외교정책과 같이 이루어지게 되어있는데 그것의 근간은 경제적 실익에 대한 정책이며 이것은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에 자본의 형평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군대는 사라진다는게 그들의 논리입니다.즉 다른나라 군대는 모르겠지만 미군은 그 형평한 분배를 촉진시키는 민주적 방위군이라는 설명이죠.
    그럴싸 하지만 과연 지금의 선진국 주도하의 차별적인 외교정책을 바탕으로한 상황에서 형평한 분배가 과연 이루어질까도 의문이고
    그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자본는 어차피 고갈되는 유한성 인해 그 분배도 한계가 존재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즉 힘이 있는 자가 독점하게 된다는 인간의 욕망을 설명할수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위의 답은 다분히 힘 있는자들이 우선적으로 얻는게 당연하다란것을 정당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과연 그들이 없는자들에 대해 분배하려 들까요? 이라크전이 왜 발발했는지 당시 여군지원제에 대해 찬성한 다수의 여성단체들은 이라크전에 참여한 여군을 마냥 피해자라고 떠들기만 할뿐 반성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도 요즈음 양병거 문제의 대두로 인해 징병제의 폐단에 대한 여론이 많이 형성되어있지만 앞에 장교입문에 대한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하면서도 징병제가 갖는 성차별주의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하고 군폐지론을 언급하는 중첩된 시각은 많은 서구적 페미니즘이 갖는 모순을 드러내줍니다.
    실질적인 의미로써 작용되는 페미니즘이란것에 혼동을 갖을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게 문제죠.이것은 서구적 페미니즘이 갖는 수단이며 모순입니다.어떻게 보면 보수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는게 아닌지...
  • 딜레마 2004/05/25 [21:34] 수정 | 삭제
  • 진정한 페미니즘, 모든 성차별주의와 폭력에 반대




    ⓒ2003 백년글사랑
    벨 훅스는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 명제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고, 동시에 그 행위자가 누구든간에 모든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문제의 핵심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훅스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성차별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 페미니즘이다. 그는 성차별주의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여자는 예쁘고 목소리가 작아야 하며 정숙해야 한다'는 따위의 고정관념은 남자에게도 존재한다. 약골에다 목소리도 작은 많은 남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부정하고 '사내다워지도록' 훈련받는다. 성차별주의가 강조하는 모성본능은 여자에게는 어머니될 것을 강요하고 남자에게는 양육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도록 하는 양날의 칼이다.


    훅스의 또 다른 화살이 향하고 있는 쪽은 페미니즘 내부이다. 그는 "한번도 대중적 페미니즘 투쟁에 정치적으로 투신한 적이 없으면서 페미니즘이 자신의 계급 이동을 추동할 때는 페미니즘의 자리와 수사학을 채택하는 여자들을 가리켜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아프리카의 여성할례를 미국의 성차별주의보다 더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떠드는 서구 여성들에게는 '신식민주의적 온정주의'라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이러한 일단의 움직임들을 "계급권력을 가진 개별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제국주의적 환타지를 지구적으로 투사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다.


    가까이, 더 가까이 와서 보라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은 19장에 걸쳐 페미니즘에서 논의되는 많은 이슈들을 짚어간다. 훅스는 특유의 분명한 어조로 여성의 몸과 아름다움에서부터 페미니스트 남성성과 영성(靈性)까지 차례차례 훑어나간다. 이 많은 내용을 한권에 담기란 쉽지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설명이 부족하거나 논의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번역상의 오류도 더러 발견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을 둘러싼 전반적인 논쟁들을 이처럼 간략하고 개괄적으로 다룬 책이 드물다는 점에서 훅스의 작업은 적지않은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행복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동시에 새로운 호기심을 부추긴다. 자유로운 결혼과 파트너쉽, 페미니스트 부모되기 등의 소주제는 실제 생활에서 페미니즘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할 것이다.


    특히 이 책은 'Feminism is For Everybody'라는 원제가 뚜렷이 보여주듯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견고한 오해-페미니즘은 반남성적이다-를 조목조목 반박해낸다.


    훅스는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손짓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의 전부가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한번쯤 그 유혹에 넘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법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페미니즘의 바다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또한 유쾌한 일일 것이다.

    /송민성 기자 (ichae1982@hanmail.net)












    한국온 '컬러퍼플'의 작가 앨리스워커

    [조선일보 2004-05-25 17:58]


    "누구나 가진 인간愛 증언하러 왔다"
    "모든 색 꽃이 아름답듯 흑백·남녀구분 무의미"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로 퓰리처상(1982년)을 수상하며 영미문학계에 이른바 ‘할렘 르네상스’를 예고했던 앨리스 워커가 25일 한국에 왔다. 60세의 그는 나뭇잎 문양이 찍힌 연두색 블라우스에 노랗게 물들여 땋아내린 ‘드레드록’으로 인해 20년은 더 젊어보였다. 기자회견 중 누군가의 휴대전화에서 베르디의 ‘축배의 노래’가 터져나오자 즉석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한국에 온 소감을 묻자, “나는 작가로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 미국 정부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한국에 온 것도 우리가 지닌 공동의 인간성을 증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미국 남부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앨리스 워커는 ‘컬러 퍼플’ ‘여인들의 신전’ 등 20권의 저서를 낸 시인이며 소설가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워커는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로 경찰서를 밥먹듯 들락거리는 여성운동가로 더 깊이 각인돼 있다. 서구적 의미의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대해 흑인계 미국 여성들의 페미니즘을 뜻하는 ‘우머니즘’을 만든 것도 그다. “우리는 백인 남성뿐 아니라 백인 여성들의 힘에 의해서도 억압받아 왔으니까요. 어머니는 내게 인종에 대한 올바른 메타포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날 우리에게 정원을 한번 바라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곤 말씀하셨죠. ‘모든 색깔의 꽃들이 피어 있지만 어떤 꽃도 다른 꽃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라고요.”

    워커가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 된 것도 “내 아이들은 농장이 아닌 학교로 보낼 것”이라며 백인들의 방화에 맞서 학교를 지었던 부모 덕분이다. 학창 시절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쫓아다니며 민권운동에 뛰어들었고, 1980년대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함께 페미니스트 저널 ‘미즈’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문학도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의붓아버지와 남편에게 학대받던 흑인 여성 실리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는 과정을 그린 ‘컬러 퍼플’은 근친상간, 가정폭력 문제 등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들은 물론 ‘강요된 하느님’ ‘백인이고 남자인 하느님’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까지 여지없이 깨뜨린다. “왜 우리는 부모와 사회가 ‘믿으라!’ 하고 가르친 신만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영혼이 느껴서 받아들이는 절대 존재를 스스로 찾아야 하지요. 하느님은 저 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신성(神聖)은 존재합니다.”

    ‘어머니처럼 훌륭한 농부가 되기 위해’ 캘리포니아 자택에 커다란 정원을 가꾸는 워커는 요즘 자연요법에 심취해 있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지금은 마음을 열어야 할 때(Now is a time to open my heart)’는 1년간 아마존 밀림에 들어가 원주민 무당과 함께 지낸 이야기다. “나무와 꽃을 가꾸면서 식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뿐만 아니라 상처도 치유해준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식물 때문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남미 토착민들이 태곳적부터 활용해온 주술의학을 배웠습니다. 결국 대지와 자연이 인간의 병을 치유할 것입니다.”

    15일간 한국에 머무는 워커는 경남 하동 새미골에서 일반인과 함께하는 평화기행(6월5~6일)을 비롯해 이화여대 특강(28일), 평화음악회(29일)를 미국 유니언신학대 현경 교수와 함께 진행한다. 방한을 맞아 워커의 저서들도 여러 권 출간됐다. 그중 ‘현경과 앨리스의 신(神)나는 연애’(마음산책)는 두 여성운동가의 공동 시집이자 한국 여성들이 그들에게 던진 열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다.

    (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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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원 2004/05/25 [19:08] 수정 | 삭제
  •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흑인여성의 인권문제를 알리고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이면서 동시에 여성인권운동가란 점에서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 Minjung 2004/05/25 [14:48] 수정 | 삭제
  • 칼라퍼플을 읽고 한동안 앨리스 워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었습니다.
    그녀의 사상의 폭을 가늠하긴 어렵지만, 그리고 제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통찰력 있는 작가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할례와 같은 여성폭력이 또 다른 폭력에 무심하게 만든다는 얘기도 퍽 와닿습니다.
    사랑의 힘은 안 본 작품인데 조만간 보아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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