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던 이반(성소수자)이 처음 이반 커뮤니티에 발을 들여놓으면 일단 자신과 동류인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다양한 오프 모임에 참석하고 이반 친구들과 몰려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이반들을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6개월만 지나면 “이 바닥 정말 좁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는 <링크>(Linked)라는 책에서 “여섯 단계의 분리(six degrees of separation)”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무작위로 선택된 두 개인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에 평균적으로 6명의 지인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개념이다. 재치 있는 사람들은 조밀한 인맥을 자랑하는 헐리우드 영화계에 이 개념을 적용하여 “케빈 베이컨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두 배우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 사이트는 순식간에 두 배우를 연결하는 최단 경로를 알려준다. 헐리우드 배우들은 평균 3단계의 링크(지인)를 거치면 다른 모든 배우들과 연결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반 커뮤니티에서 무작위로 뽑힌 2명의 이반을 이으려면 몇 단계나 필요할까? “아, 그 친구? 나랑 이런저런 커뮤니티 같이 했던 사람의 친구야.” 혹은 “내가 사귀던 사람과 같은 커뮤니티 했던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2~3명의 지인만 끌어들이면 웬만한 이반들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The L Word]에서는 알리스가 쉐인을 중심으로 인맥도를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노는 사람들이 빤한 바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이반 커뮤니티는 소수의 한정된 사람들로 이뤄진 모임이기 때문에 관계가 중첩되는 현상이 흔하다. 이반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는 나만의 친구가 아니라 애인의 친구인 경우도 많고 내 친구의 애인인 경우도 많다. 친구의 애인이라서 친해졌다가, 친구 커플이 깨졌다고 해서 커플 중 한 명과 친구 관계마저도 청산하다가는 내게 남아나는 인맥이 없다. 내 애인과 내 친구에게 못되고 불편한 짓을 한 사람이라 해도 나와 문제가 없으면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좁은 바닥은 한정된 인맥만을 제공하므로 쿨하게 살기 힘든 바닥이기도 하지만, 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바닥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이고 관계가 형성되는 곳에는 당연히 비밀과 소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누가 바람을 피웠다더라”, “둘이 이래서 헤어졌다더라”,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는데 상대가 이렇게 나왔다더라” 라는 식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마저도 한 사람 안에 갇혀있길 거부한다. 이반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비밀은 일반들과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한없이 무겁지만 커뮤니티 내의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가볍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친 말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랜 시간 그 공간을 머문다. 한낮의 땡볕에 진작 사라졌어야 할 웅덩이의 물이 몇 달 내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격이니 걸을 때 마다 질척거린다. 붙임성이 좋아 발이 넓은 친구 A.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 개씩만 털어놔도 A에게는 많은 비밀이 쌓인다.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마냥 소리지르고 싶은 그는 자신의 지인들과 교류가 없는, 그러니까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내 앞에서 숨통을 터놓았다. “이거 나 혼자 가슴에 담기에는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인데, 그냥 들어만 주라.”라고 이야기를 꺼냈고 곰곰이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 친구에게 쪽지를 보냈다. “너랑 나랑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자. 우리 너무 친해지지 말자.” 그와 내가 친해져 서로의 인맥이 겹치기 시작했을 때 또다시 갈 곳 잃은 비밀의 무게에 짓눌릴 것이 두려워 나온 우습지도 않은 제안이었다. 비밀을 털어놓되 공공연한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적당히 낯선 사람을 찾게 된다. 그러나 좁은 커뮤니티에서는 관계와 관계가 겹칠수록 비밀을 털어놓을 사람이 마땅찮아진다. 바닥이 좁다는 것은 안심하고 이야기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답답한 의미이기도 하다. 소수자들이 이룬 커뮤니티인 만큼 이반 커뮤니티 안에서 나와 무관한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 친구 혹은 ‘내 친구의 친구’ 형식으로 한두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호모포비아 지수만큼이나 이반 커뮤니티는 폐쇄적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고 이반 커뮤니티의 담장 안에서만 이뤄진다. 사귀는 사람이 she인지 he인지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사회이거나 누구나 양성애자 가능성이 있음을 손쉽게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모를까,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공공연한 비밀과 중첩되는 관계들 사이를 오가며 질척하게 혹은 쿨하게, 때론 답답하게 이 바닥을 살아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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