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스틴 파워>의 한 장면. 닥터 이블과 뜨거운 밤을 보낸 프라우 파비시나, “다시는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 예언은 결국 맞았다)이라던 그녀가 어느 날 새 애인을 데려왔다. “우린 LPGA 투어에서 만났어요. 이쪽은 ‘일자눈썹(unibrow)’.” 그 사람은 굵은 일자눈썹이 돋보이는 당당한 체격의 여성 프로골퍼. 프라우 파비시나는 ’일자눈썹‘의 골프장갑 낀 손을 만족스럽게 쓰다듬는다.
여성 스포츠인에 대한 세간의 부당한 편견이 우리나라에서는 “선머슴” 혹은 “덜 성숙한 여성” 정도라면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서구사회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낙인으로 존재한다. 이 관념 차이는 아마도 레즈비언의 가시성 때문이겠지만 어디서나 “저들은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다.”라는 전제는 깔려있다. “레즈비언 운동선수”는 대중문화에서의 농담거리였고 사람들 머릿속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 ![]() 이런 사회적 편견은 나브라틸로바 이전에 1910년대 이후 미국에서 여성의 스포츠 참여도가 높아지기 시작한 시기부터 암암리에 존재했다. 때문에 여성들은 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했고 겁에 질린 프로 리그 경영자와 체육 지도자들은 사회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여성상을 내세워 홍보했다. 영화 <그들만의 리그>에서 여자 야구 선수들이 특정한 복장과 머리모양을 지도 받고 차밍스쿨 교육을 받는 장면은 그 단적인 예다. 2차 대전이 배경인 이때에는 경영자들의 전략이 가정적인 여성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편이었다면 동성애자의 가시성이 높아지는 전후 1940~1950년대에는 레즈비언 혐의를 불식시키려는 방어에 가까워진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이 ‘낙인’은 여성 스포츠인의 성취를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남성 중심 스포츠계의 여성 비하와 동성애 혐오의 소산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레즈비언과 스포츠의 상관관계의 발견은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관찰이기도 하다. 물론 이 관계는 그들의 편견대로 ‘스포츠=남성성=레즈비언’의 단순한 도식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다른 사회적 공간보다 스포츠계에 레즈비언 비율이 높다는 큰 표본의 공식적 통계는 물론 없다. 다만, 몇몇 스포츠사 연구 자료와 ‘카더라 통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을 이용해볼 때 더 많다고 인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존재감이 상당히 가시적이다. 수잔 칸(Susan K. Cahn)은 여성 스포츠가 미국에서 레즈비언 하위문화와 정체성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레즈비언이 스포츠에 몰려온 것인지 스포츠가 각자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인정하기 쉬운 상황을 만들어 주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던 특성들―적극성, 역동성, 스피드, 파워―이 스포츠에서는 미덕에 해당했고 많은 레즈비언들이 스포츠 안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해방감을 느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자면 일단 머리 짧은 것이 더 이상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운동하기에 편하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또 바깥에서와 달리 이 곳에서는 ‘여자처럼’ 공을 던지면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스포츠가 깃발을 높이 든 레즈비언의 해방구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비밀의 네트워크에 가까웠다. 이 점이 게이 바나 동성애자 자긍심 행진과 달랐다. 스포츠는 굳이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여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드러난 외침보다는 암묵적인 추정과 몸짓, 분위기가 소통수단이었다. 물론 어디서나 둔한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니 어떤 이들은 그 경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겠다. 따라서 스포츠는 아는 사람만 아는 안식처, 은근히 레즈비언 정체성을 끌어안을 수 있는 곳으로 작용했다. 물론 요즘에도 비밀스러움을 얘기하기는 무색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수면으로는 떠오르지는 않는다. 리그 경영자들은 레즈비언 미팅 장소로 일반인의 인식이 굳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선수들은 은퇴 후나 더 이상 비밀도 아닌 무렵에 커밍아웃을 한다. 이래저래 관람자들만 남들에게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인 것 같다. 지난 아테네 올림픽 중 TV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비치발리볼 여자부 결승을 보게 되었다. 그간 비치발리볼이라는 스포츠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선입관과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는 것을 내켜 하지 않다가 처음 시청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점수를 따고 우승을 확정 지으며 환호하는 미국 팀의 두 선수. 비키니 차림의 그들이 서로 껴안고 모래밭을 뒹구는 장면, 점수 딸 때마다 불필요해 보이는 신체접촉을 해가며 기쁨을 표하는 장면을 보고, ‘건전한’ 스포츠관람을 기대했던 나는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무언가 수상함을 느끼며 인터넷에 접속해 레즈비언들이 모이는 게시판(영어사용자들의 게시판이었다)에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그 게시판은 “둘 다 남자친구 있다니 날 샜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라는 분위기였다. 하여간 레즈비언들은 이래서 귀엽다. 초이성애적 이미지의 스포츠에서 또 구경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왠지 많은 것을 놓친 게 아닐까 아쉬워하며, 날 설레게 하였던 그간의 스포츠 경험들─때로는 관람자로서, 때로는 직접 뛰는 선수로서─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날 밤, 나를 운동장 중앙에 모셔두고 말총머리 찰랑거리는 축구 선수들이 공을 차고 구릿빛 피부의 소프트볼 선수들이 캐치볼 하는 레즈비언들만의 운동장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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