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김혜정님은 부산여성성적소수자인권센터(www.womcenter.org)에서 활동하는 레즈비언인권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부치’(butch)와 ‘펨’(femme)은 레즈비언 중의 어떤 유형을 지칭하는 단어다. 누가 이 단어들을 만들어냈는지, 정확한 개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부치’는 중성적인 스타일의 외모나 성격을 가진 레즈비언, ‘펨’은 보다 여성적인 외모나 성격을 가진 레즈비언을 뜻한다. 특히 성격보단 외모로 유형을 구분하는 경향이 강하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들어와서 “부치예요, 펨이예요?”라는 질문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금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전 전천후랍니다, 하하하~”하고 웃어넘겨 버리지만 처음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들어왔을 땐 “저는 그런(부치/펨) 구분 싫어해요”라고 말해서 주위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부치/펨’을 구분하는 이유는 주로 교제와 관련된 것이다. 흔히 부치 스타일의 레즈비언은 펨 스타일의 레즈비언을, 펨 스타일의 레즈비언은 부치 스타일의 레즈비언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취향을 가진 경우도 있지만, 부치/펨 문화 때문에 그렇게 짝지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가령, 내가 아는 한 레즈비언은 외모가 펨 스타일로 보이기 때문에 주위에서 항상 부치 스타일의 레즈비언을 소개시켜 주는데, 자신은 그런 취향이 아니라 괴롭다고 한다. 부치/펨 문화는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남성’과 ‘여성’이 짝을 지어야만 한다는, 수천 년간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공고하게 다져진 전제가 여성들 간의 사랑에도 끼어들어 굳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나누어 짝을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다양한 동성애자 커플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치/펨’ 문화가 만연한 원인일 수도 있다. 현재 한국의 ‘부치/펨’ 문화가 서구의 20년 전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는 한 외국인 친구의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한 것 같다. 또한 ‘부치/펨’ 문화의 영향력이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약해지는 걸 봐도 그런 것 같다. 레즈비언을 ‘부치’ 아니면 ‘펨’ 이렇게 나누는 문화는 레즈비언의 개성과 다양한 욕구를 누르게 하는 면도 있다. 요즘 나는 ‘부치’를 남성적, 또는 남성성이란 말을 사용해 설명하는 경우들에서도 뭔가 위험하단 느낌을 받는다. 한 사람의 특성을 ‘남성성/여성성’만으로 얘기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왜 다른 특질들에 앞서 ‘남성성/여성성’이란 구분이 한 사람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잣대가 되어버리는 걸까. 사실 ‘남성성/여성성’의 이분화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부치’ 스타일을 ‘남성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기존 ‘남성성/여성성’이란 개념에 갇혀 우리가 다른 상상력과 언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부치’는 남성성과 별로 관련이 없는지도 모른다. 기존의 ‘여성성’이 현실적으로는 실제 여성들(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개념이란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더더욱 그러하다. 짧은 머리의 여성, 웬만해선 치마를 입지 않는 여성, 허스키 보이스의 여성이라 해서 섣불리 ‘남성성’이란 개념을 들이댈 수는 없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들어온 초기에 ‘부치/펨’ 문화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자꾸만 ‘부치, 아니면 펨’으로 나를 규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였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부치나 펨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규정하지 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자신을 부치나 펨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겐, 그럴만한 어떤 이유(각자 다르겠지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자체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본다. 다만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그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좀더 다양한 규정들과 커플 모델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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