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01번째 커밍아웃

이성애자 친구들과의 소통

혜원 | 기사입력 2005/01/24 [15:01]

[기고] 101번째 커밍아웃

이성애자 친구들과의 소통

혜원 | 입력 : 2005/01/24 [15:01]
“넌 요즘 만나는 남자 없니?”

말문이 막혔다. ‘말했잖아. 나 남자 안 좋아한다고.’ 그러나 그 말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분위기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갑작스럽게 ‘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지나가는 흔한 말일뿐인데.

나의 오랜 친구들, 그들과의 만남은 십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굳이 우리의 우정이 어떠한 것이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가 든든하고, 일년에 한두 번이지만 만나면 편하고, 속상한 일 생겼을 때 연락해 흥분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가도 그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 눈치껏 알아서 잊어주는 친구들. 그것이 우리의 관계다.

너무 가까운 사람들 간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을 공유하고 있기 마련이다. 부모에게도, 자녀에게도, 애인이나 남편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다.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를 하고, 애인에게 두들겨 맞는 등의 끔찍한 경험도 친구들 간에 함께 경험되고 또 아물어가는 아픔이다.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성격적 장점과 단점까지도 친구들은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간혹 나는 우리의 관계를 회의한다.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친구들이 내게 주는 친밀감을 과연 나는 얼만큼 공유하고 있을까. 이런 불행한 생각을 하게 되는 때는 바로 저 지점, “요즘 만나는 남자 없어?” 하는 가벼운 질문을 받을 때와 같은 경우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아니, 사귀는 사람이 예전에도 있었어. 여자야. 난 남자 취향이 아닌가 봐.” 라고 준비도 없이 말을 해버렸던 때가 언제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가 겨울이었고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연애와 결혼이 화두가 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버틸 수 없었나 보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던가? 말해 놓고 나서야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잔뜩 긴장됐는데 친구들은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별다른 반응 없이 다른 주제로 넘어갔던 것 같다. 아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 예전에도 좀 그런 면이 있었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겐 굉장히 위안이 됐다. 나는 나의 성정체성이나 연애에 대해 어떤 말도 더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그러나 그걸로 된 것이 아니었다. 내게 남자애인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해달라며 나를 재촉했겠지만, 친구들은 나의 애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게 남자애인이 있었다면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애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얘기했겠지만, 나는 애인과 헤어졌을 때조차 그 사연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친구들은 내가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잊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일을 기억해주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 가져주고, 부모님의 건강과 언니의 안부까지 잊지 않고 묻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커밍아웃 이후로 몇 번이나 비슷한 커밍아웃을 해야 했다. 그것은 매번 무척이나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서른을 넘기면서 친구들의 질문은 “너 요즘 만나는 남자 없니?”에서 “진짜 결혼 안 할 거니?”로 변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런 질문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친구들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것과 내가 동성애자란 사실을 친구들이 인식하는 것 사이엔 거쳐야 할 또 다른 많은 과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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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udam 2014/10/29 [11:22] 수정 | 삭제
  • 조금은 꾸준하게 드러내야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중학교 2학년때부터 친하게 지낸 10여명에게
    아무 성의도 없이 문자로 커밍아웃을 했어요.
    "나 여자 좋아한다. 지금 사귀는 사람도 여자고. 싫으면 연락하고 차단해라" 라고.
    사실 제가 워낙 이런 문제를 무겁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 친구들을 제가 워낙 믿고 있었던 게 컸죠.

    다행히 제가 여자를 좋아하는 점, 그 외에는 자신들과 똑같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해주는 친구들이라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그 이후에 제가 한 커밍아웃들에 많은 힘이 되어줬지요.

    하지만 그 이후에도 몇년간은 아무 생각 없이 "야 이 게이같은 새끼야" 라고
    제 앞에서 게이를 욕으로 쓰곤 하더군요.
    저도 분위기를 망칠까봐 처음 1년간은 가만히 참고 있었지만,
    이게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결국 적극적으로 말하게 되었어요.
    "듣는 게이 기분 나쁘다." "게이를 욕으로 쓰냐ㅡㅡ" 이런 식으로요.
    또 연애상담도 하고, 연애경험도 나누고 하니 친구들도 저를 배려해주는 게 느껴졌고,
    제가 기분 나쁘다고 정색했을 때 저를 욕하거나 하는 친구들도 없었어요.
    처음에 말할 땐 눈치가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막상 말해놓고나면, 정말 크고작은 상처까지 나누는 친구들이라면
    배려해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 miro 2005/01/31 [13:03] 수정 | 삭제
  • 저는 이성애자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면서
    제가 불편한 말이나 행동들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죠.
    구체적인 예시까지 들어가며 말이죠.
    없던 일로 치부, 이해못함, 혹은 무관심 이런 것들에 대해.
    덧붙여 나의 모든 것을 레즈비언으로 일반화하지 말 것도 얘기하고
    아웃팅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도 말하지요.
    (정말 한참을 얘기한다는...^^)

    그렇지만, 모르겠어요.
    아직 제 나이가 결혼을 얘기할 때는 아니니까...
    친구들은 다들 그저 가볍게 남자친구를 사귀는 정도니까요.
    그리고 제가 나온 고등학교는 -대부분이 고등학교 친구들인데-
    (이성애자가 보기에도 티나는;;) 레즈비언이 꽤 많아서
    친구들이 대체로 거부감이 적은 것도 영향이 크겠죠.

    친구들이 결혼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 리건 2005/01/31 [11:00] 수정 | 삭제
  • 커밍 아웃을 한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행동이 게이스럽다고 해석되는 것과, 그렇게 무심하게 대해지는 것 중 무엇이 더 난감한지 감이 안 잡히네요. 커밍아웃하면, 일반 친구들이 그 게이를 정체성의 모든 것으로 과도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잖아요. 그것도 숨막힐 거고..

    저는 친구가 커밍 아웃을 하면 '아, 나를 믿을 만한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구나'싶어서 기분이 좋던데요. 그 사실을 머리 속에 꼭꼭 넣어두려 하지요.
  • luke 2005/01/31 [09:46] 수정 | 삭제
  • 그 땐 쪼금 상황이 나아지겠죠.
    그걸 바래야겠죠...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 흐음 2005/01/28 [00:38] 수정 | 삭제
  • 어느 나이가 넘어서면 애인이 없다는 것이 아주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 2005/01/25 [21:55] 수정 | 삭제
  •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하죠..
    아무리 커밍아웃해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실을 아예 언급조차 안하는 그런 때..

    마치..뭔가 암묵적 무시같은 거..
    유리벽같은..거..
  • 곰세마리 2005/01/25 [11:28] 수정 | 삭제
  • 남친 없냐는 얘기 골백번도 더 듣고 있습니다. -_-
    부모님, 친척들, 친구들에 모자라서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ㅠㅠ
    다 우릴 괴롭히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도 고의는 아니겠지만요.
    커밍아웃이 맘 편한 사람한테도 쉽지 않은 일 같아요.
  • chobi 2005/01/24 [22:20] 수정 | 삭제
  • 점점 이반들끼리만 알고지내게 되고.. 아무래도 그렇게 되잖아요.
    결혼한 친구들이랑 멀어지는 게 안타까와요.
    기자님은 친구들끼리 굉장히 친하신가봐요. 좋은 우정 쌓아가시길...
  • 티티 2005/01/24 [18:22] 수정 | 삭제
  • 커밍아웃이 한 번 용감하게 나 동성애자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현실은 더 힘들고 지치게 하고 평생 그런 부담이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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