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문제아야.”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친구 하나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사실 그 친구를 보면 그다지 ‘문제아’로 볼만한 것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가끔 보충수업을 빼먹고 노래방에 가고 미팅을 하고, 그런 정도였다. 그런데 유독 그 친구는 모든 것에 대해 자책감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험이 끝나 친구들끼리 교복을 입고 노래방에 갔다. 당시에는 노래방에 학생이 출입하는 것은 금지였는데, 마침 그날 안타깝게도(?) 단속이 나왔다. 갑작스런 단속에 우리들은 모두 엎드려 소속과 이름을 말했고 명단은 학교로 넘어갔다. 그 다음날 담임은 명단에 적혀있는 이름을 불렀고, 우리는 호명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정작 긴장한 우리들에게 교사는 대뜸 “넌 노래점수 몇 점 맞았냐”고 묻고는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여전히 그 친구는 매우 침통하고 우울한 얼굴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지레 겁을 먹은 친구가 부모에게 노래방에 간 사실을 이실직고했고, 부모는 불이라도 난 듯 놀라서 학교를 찾아와 교사에게 사죄했다는 것이다. 난 그 친구의 부모를 보면서 그 친구가 평소 왜 그렇게 자신을 ‘문제아’ 취급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 친구는 조금만 부모의 기대에 못 미쳐도 ‘별종’이거나 ‘문제아’ 취급을 받았었고, 그런 자신을 서서히 ‘막 나가는 애’로 정체화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실 노래방에서 노래 몇 곡 부른 것이 대단한 죄는 아니다. 사회는 ‘노래방 학생 출입금지’를 원칙으로 정해놨지만 교사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집에서는 노래방 갔다 온 것쯤은 웃으며 허용할 수 있는 해프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집에서는 그것이 금기였고 일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가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체계다. 자라면서 우리가 가장 밀접하게 부딪히는 관계 중 하나가 아마 부모와의 관계일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기준은 아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각 가정의 가치판단과 규칙은 대부분 부모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기준에 따라 ‘문제아’가 되기도 하고 ‘모범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 혼전 성교는 안 된다’, ‘10등 이하는 안 된다’, ‘9시까지는 귀가해야 한다’ 등등 부모가 정해놓은, 암묵적으로 들이대는 각 가정의 규칙들은 정상과 일탈을 가를만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저 부모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옳고 안전한 것’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듯 부모의 금기가 강력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과실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자책한다는 데 있다. 안 그래도 사방에서 ‘금기’를 들이미는 사회 속에서 부모마저 세상 무너질 듯 덜덜 떨며 두 손을 내젓고 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겠나. 사실 자식이야 누구든 부모의 기대치를 하나하나씩 깨나가는 삶을 살지 않던가. 그런데 유독 그 기대에 못 미쳐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면 그들의 어깨에 얹혀 있는 부모의 무게를 느껴진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대에서 하나씩 벗어날 때마다 ‘부모 실망시키는 놈’, ‘인생 글러먹은 놈’, ‘어둠의 자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나서 정말 ‘막 나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돌이켜보면, 그 친구를 정말 ‘문제아’로 만들었던 것은 부모의 ‘금기’였을 뿐이다.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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