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지 않아”

벽장 속의 기억

미니 | 기사입력 2005/02/07 [15:48]

“다시 돌아가지 않아”

벽장 속의 기억

미니 | 입력 : 2005/02/07 [15:48]
이번에는 또 어떤 어줍잖은 만담을 써야 할까 생각하면서, 이반감성란의 지난 칼럼들을 모두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삶의 무게와 고민이 느껴지는 글들. 각각 다른 상황이겠지만 저마다 녹록치 않게 살고 있을 그녀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내가 만일 레즈비언 ‘바깥’에서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웃기지만 한 번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 과연 이 칼럼들을 읽고 기꺼이 레즈비언이 '되려고 할' 사람들이 있을까?

자세한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자. ‘성적 지향’은 어렴풋이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궁금증 많지만 두려움도 많은 십대 시절의 나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장난기 어린 과장이 허락된다면 내게 들린 독백을 묘사해 보겠다.

어두컴컴한 무대. 잔인하게 밝은 조명이 낡은 의자에 앉아있는 한 여자를 내리 비춘다. 지쳐 보이는 그 사람은 입을 열어 말한다.

“우리 동아리는 동아리 공간도 좁고 부실하고, 아직 정식으로 인가도 못 받았어. 유령이지 뭐. 다른 동아리도 우리를 무시하고, 보조금도 제대로 못 받아. 고학번들은 학년 올라가면 어디로들 사라지고, 힘들어서 중간에 아예 나가는 사람도 많아. 생계 걱정도 있고 어디 가도 인정 받지 못 하니까 그렇지 뭐. 밖에 나가서 우리 동아리라고 그러면 살기 힘들 거야, 조심해라. 물론 이제 차츰 공개적으로 활동해야겠지. 하여간 여기는 힘들어. 그래도 들어오려면 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은 ‘슬프지만 진실인 것들’을 또박또박 전하는 이반감성 칼럼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겁 많았던 십대를 보냈기에 이 느낌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아아, 그때 나는 정말 귀찮았다. 내 욕망과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이미 ‘여자’ ‘청소년’으로 살면서 ‘2등 시민’이 된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주류 안에서 남들의 축복 받으며 한 자리 잡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저기 구석에 있는 ‘천민 부락’으로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성적 지향은 느껴지지만 꼭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내가 가시밭길을 갈 이유가 있는가. 짝사랑도 자꾸 하면 할 만 한데 말이지. 복잡하게 정치적으로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고도 어떻게 살다 보면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적당히 마음 속에서 타협했다. 한 마디로 행복해지는 것을 거부했다.

시간이 더 지나 기회가 생겨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곁눈질하고 있었을 때는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이질감을 느꼈다. 나에게는 없는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레즈비언 정체성이 있는 것 같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곳에 어떤 방식으로 낄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너무 남들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바보같이 먼 길을 돌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종점에 ‘레즈비언’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운명인 걸까. 그렇게 결론지으면 나 자신의 무의식적인 지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된다. ‘여자들’을 따라가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본능 만세.

요즈음의 십대들이 설마 이렇게 소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언어와 이미지를 발견하기 쉽게 해준다. 인터넷상의 까페, 블로그, 게시판 같은 그들의 공간을 엿볼 때마다 지금의 십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별로 연결 지을 수 없는 곳에서도- 자신들만의 커밍아웃 스토리를 향해 한 걸음씩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연애를 향해서라도. 어떻든 자신을 가두거나 학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움츠러드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왕년의 겁쟁이, 나는 이제 ‘이반감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칼럼을 쓸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레즈비언 정체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상을 보내며 내 존재 자체가 희미해질 때가 있다.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레즈비언 자격증이 만료하는 게 아닐까도 싶고. 그럴 때면 내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숨겨야 했던 십대 시절을 떠올려 본다.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다. 나는 이미 벽장에서 나왔는걸.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아자아자 2008/10/27 [12:49] 수정 | 삭제
  • 습관이 되는데...
    벽장 속에서 나오셨다니 화이팅입니다요!!!
  • ..... 2008/10/14 [19:39] 수정 | 삭제
  • 지금의 제 모습이라 씁쓸하군요
  • 초록 2005/02/10 [21:34] 수정 | 삭제
  • 저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천민부락이라고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이반이라는 거, 이반으로 살아가기로 했다는 거, 당당하고 행복합니다.
  • 니나 2005/02/09 [17:08]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힘 불끈 솓고..
    감동 불끈..
  • 롤러장 2005/02/09 [02:11] 수정 | 삭제
  • 여기 글 쓰시는 분들 다 자랑스럽습니다.
  • 미라 2005/02/08 [17:28] 수정 | 삭제
  • 있잖아요..
    여기 기사들 보면 눈에 선해요.
  • ari 2005/02/07 [23:53] 수정 | 삭제
  • 좀더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요즘 청소년들은 살기가 더 편한 것 같아서요.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찾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던지요.
    요즘 청소년들도 나름대로 힘들긴 힘들겠지만 우리보단 낫겠죠.
    나도 이반감성에 칼럼을 쓸 정도로 레즈비언으로서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칼럼들 다 잘 보고 있는데, 힘들어도 자신감이 있는 분들 같아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