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즐거움, 나를 움직이는 힘

만화가 표혜원

박희정 | 기사입력 2005/02/22 [00:23]

창조의 즐거움, 나를 움직이는 힘

만화가 표혜원

박희정 | 입력 : 2005/02/22 [00:23]
순정만화가 표혜원씨는 서른 두 살이라는, 순정만화가치고는 꽤 늦은 나이에 데뷔를 했다. 만화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그림도 즐겨 그리긴 했지만 일찍부터 만화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는 패션잡지를 꼬박꼬박 읽을 만큼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의상학과를 졸업한 이후에는 국내 유수의 패션기업에 디자이너가 되었다.

좋아하는 옷 디자인 일을 그만두게 된 연유를 묻자,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혜원씨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디자인 실은 살짝 미치거나 독하지 않으면 절대 못 견디는 곳이에요.”

“옷을 그렇게 밖에 못 입어?”

일을 그만둔 지 수년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살짝 한 톤 올라간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흘러나온다. 맺힌 게 정말 많았나 보다.

“디자이너는 옷을 매일 바꿔 입고 와야 해요. 옷을 잘 못 입었다 싶은 날이면 실장이 ‘아무개씨 이리 와봐요’ 하고 불러. 앞에 세워 놓고는 ‘(디자이너가) 옷을 그렇게 밖에 못 입어?’ 내일부터 좀 제대로 입고 와!’하고 혼나는 거지.”

디자이너가 1년 단위로 갱신되는 계약직이다 보니 과도한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교통비 수준의 박봉에, 쉽게 잘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장래성도 안 보였거든요. 잘 올라봐야 실장인데 34, 5이면 실장 직에 있을 수도 없어요. 감각 떨어진다고 회사에서 있기가 힘들어지거든요. 디자이너라는 게 노조도 없고, 계약직이라서 힘들어요. 실장 직에서 그만두면 대기업 하청 액세서리 제작이나 개인 의상실 낼 수 있을까…이사까지 가는 건 아주 극소수의 얘기고… 또 우리 나라 디자인은 외국제품 카피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회사에서 외국 백화점에 전시된 제품들 사진 찍어서 카피하게 해서 ‘한국인들은 사진 못 찍게 하라’는 공문이 붙을 정도였으니까요. ”

스트레스로 병이 생길 지경이 되자 혜원씨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혜원씨에게 만화기자(당시 ‘댕기’ 편집부)가 된 고등학교 동창이 던진 한 마디가 혜원씨를 만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너 만화 잘 그렸잖아. 만화 한 번 그려봐.”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서른이 넘어서 만화가라는 전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니, 불안하거나 고민하게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게 왜 고민이 되느냐’고 되묻는 눈빛이 돌아온다. “시작하는 시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늦게 시작한 사람들은 다른 경험을 쌓게 되고, 풍요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색깔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으니까요.”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혜원씨답게, 결정은 간결하고 행동은 명쾌하게 이루어졌다. ‘만화 한 번 그려오라’는 친구의 말에 당장 원고를 그려서 가져갔다. 혜원씨의 첫 원고를 본 친구의 말은 “너 만화학원부터 다녀라”였다.

데뷔하기엔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이었다. 혜원씨는 그 말대로 6개월 간 만화학원을 다녔다. 그 이후 공모전에 출품, 낙선을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 모 출판사에 가져간 원고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단행본 출판이 결정되었다. 4개월의 산고 끝에 첫 작품 ‘불량천사의 뉴욕 스토리(서울문화사, 전 3권)’가 나왔다. 서른 두 살, 만화가로서 정식 데뷔였다.

“엄마, 나 숨을 못 쉬겠어”

올해로 서른 여섯이 되는 혜원씨는 결혼 생각이 없다. 연애경험에 대해 슬쩍 묻자 “스토커 같은 남자 만나 고생한 기억밖에 없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싫다고 그러는데도 ‘니가 아직 날 몰라서 그래.’라면서 끈질기게 굴었죠. 그래서 그런가 남자를 잘 못 만나겠어. ”

무엇보다도 혜원씨의 하루는 너무 바빠서 연애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턱없이 낮은 고료로 단행본 작가로만은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영어과외를 투잡으로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과 그에 따른 준비, 작품에 쏟는 시간, 개인적인 영어 스터디까지 합치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지금은 결혼과 관련한 어머니의 잔소리가 많이 줄었지만, 서른 즈음에는 결혼하라는 성화가 엄청나셨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작정을 하신 거지. 들들 볶기 시작을 하는데, 오늘은 누구 선봐라. 내일은 누구 선봐라. 내 인생 내가 살게 놔두라고 화도 내고…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내가 A형이거든요. A형은 열 받으면 참고 있다가 어느 순간 한 번에 잘라버려요. 여행 갈 준비를 다 끝내놓고, 엄마한테 말했죠. 나 내일 유럽 가. 영국으로 가서 엄마한테 전화를 하니까 엄마가 ‘시집 가란 말 안 할 테니까 빨리 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6개월 후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과호흡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간 것이다.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된다구요?” 의사의 말을 일부러 엄마가 들을 수 있게 크게 반복해서 되물었다. 그 이후로는 결혼하라는 성화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캐릭터를 만드는 게 즐거워요

얼마 전 혜원씨는 동화 공모전에 동화를 응모했다. 그리고 현재 세 번째 만화 타이틀을 구상 중이다. 세 번째 작품에서는 스토리 작가로 참여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림도 좋아하지만, 혜원씨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에 훨씬 더 애정을 느낀다고.

디자인에 대한 애정도 이야기 안에서 풀어내고 있다. 혜원씨가 연재한 두 타이틀-불량천사의 뉴욕스토리, 소다팝- 모두 패션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리면서 등장인물들의 의상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아이디어의 원천에 대해 묻자 혜원씨는 자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같이 영어 스터디하는 모 대기업 직원에게 문화인프라에 투자해야 된다는 얘기를 했더니 단번에 돌아오는 대답이 ‘그럼 뭐가 나오는데’ 라는 거였어요.” 휴대폰이나 IT기술처럼 확실하게 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열이 받았죠. 이번에 쓴 동화도 그 사람에게 복수(?)하는 의미로 만든 내용이에요. 하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혹은 세수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그렇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만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기 위해서다. 지적을 받으면 마음 상해하기 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고쳐야 할까를 주로 생각한다는 혜원씨를 보고 있자니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화를 나누던 중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진 혜원씨의 책으로 시선이 갔다. ‘한국의 도깨비’에 관한 책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차 읽고 있는 것이라 했다. 인터뷰 내내 혜원씨에게서는 경제문제, 여행, 국내의 문화정책, 인터넷 상의 저작권 문제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친 말들이 쏟아졌다. 혜원씨가 가진 호기심의 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화하는 사람들은 가끔 한가지 세계에만 몰입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만화를 좋아하니까 만화만 파고든다는 거죠. 하지만 아는 게 적으면 나오는 것도 적다고 생각해요.” 풍요로운 만화를 그리기 위해 풍요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혜원씨는 오늘도 호기심의 끈을 팽팽히 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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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꾸꾸 2005/02/27 [15:53] 수정 | 삭제
  • 그러고보니 나이 많이 들어서도 잘리지 않는 직업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주 젊은 만화가들의 작품만 접할 수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여성작가들은 특히요. 표혜원님의 작품은 머리 하얗게 될 때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른 직장에서의 아픔도 있었으니, 만화가로서 더 열심히 하실 것 같네요.
  • CHJ 2005/02/23 [11:46] 수정 | 삭제
  • 만화가.. 자유롭게 자신의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직업이죠. 다른 예술, 대중문화 쪽에 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여성들이 많다는 점이 그래서겠죠..

    그치만 표혜원님 얘기처럼. 고료가 적고 시장도 험해서 집이 원래 돈이 많지 않으면, 보통 투잡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창작에만 매달릴 수 없게 만드는 현실.. 안타까와요.

    문화에 대한 투자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하는 게 우리나라가 문화선진국이 될 수 없는 이유겠죠. 만화를 통해 많이 꼬집어주세요.

    표혜원님 만화가 인생길에 화이팅을 보냅니다. 책도 꼭 보고 싶네요. 만화팬이라고 자부할 순 없지만, 몇권 정도는 책장에 꽂혀있죠. ^^
  • 지혜 2005/02/22 [20:07] 수정 | 삭제
  • 보기 좋아요.
    저와 갠적으로 알게 될 분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분 보는 것만으로도 친구처럼 느껴져요.
    저도 싱글로 살 거거든요.
    자기 하고 싶은 일 계속할 수만 있으면 돈이 없고 힘들더라도,
    인생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 sunny 2005/02/22 [11:52] 수정 | 삭제
  • 만화가라고 하셔서 더 관심이 끌리더군요. ^^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만화가들도 쪼들리는 건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거대한 숲에 덮이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자기 의지대로 창조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 같아요.
  • 여자 2005/02/22 [08:21] 수정 | 삭제
  • 디자이너는 이쁘고 세련되었다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게 선입견이 아니라 사실이라 그렇군요. 다음날 옷 갈아입지않는다고 사무실에서 훈계를 들어야한다니,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런데다 디자이너라면 전문직인데, 그런 근무조건이라는 것도요.
    참으로 이 나라는 온 국민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누구 배를 그렇게 불리려는지...

    그나저나 제 나이또래의 열심히 사시는 분을 보니 참으로 기분 좋습니다.
    혜원씨 만화를 찾아보고싶어요.
    이런 분이 그리시는 만화라면 정말 읽기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멋지게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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