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는 옷 디자인 일을 그만두게 된 연유를 묻자,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혜원씨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디자인 실은 살짝 미치거나 독하지 않으면 절대 못 견디는 곳이에요.” “옷을 그렇게 밖에 못 입어?” 일을 그만둔 지 수년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살짝 한 톤 올라간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흘러나온다. 맺힌 게 정말 많았나 보다. “디자이너는 옷을 매일 바꿔 입고 와야 해요. 옷을 잘 못 입었다 싶은 날이면 실장이 ‘아무개씨 이리 와봐요’ 하고 불러. 앞에 세워 놓고는 ‘(디자이너가) 옷을 그렇게 밖에 못 입어?’ 내일부터 좀 제대로 입고 와!’하고 혼나는 거지.” 디자이너가 1년 단위로 갱신되는 계약직이다 보니 과도한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교통비 수준의 박봉에, 쉽게 잘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 스트레스로 병이 생길 지경이 되자 혜원씨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혜원씨에게 만화기자(당시 ‘댕기’ 편집부)가 된 고등학교 동창이 던진 한 마디가 혜원씨를 만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너 만화 잘 그렸잖아. 만화 한 번 그려봐.”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서른이 넘어서 만화가라는 전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니, 불안하거나 고민하게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게 왜 고민이 되느냐’고 되묻는 눈빛이 돌아온다. “시작하는 시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늦게 시작한 사람들은 다른 경험을 쌓게 되고, 풍요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색깔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으니까요.”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혜원씨답게, 결정은 간결하고 행동은 명쾌하게 이루어졌다. ‘만화 한 번 그려오라’는 친구의 말에 당장 원고를 그려서 가져갔다. 혜원씨의 첫 원고를 본 친구의 말은 “너 만화학원부터 다녀라”였다. 데뷔하기엔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이었다. 혜원씨는 그 말대로 6개월 간 만화학원을 다녔다. 그 이후 공모전에 출품, 낙선을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 모 출판사에 가져간 원고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단행본 출판이 결정되었다. 4개월의 산고 끝에 첫 작품 ‘불량천사의 뉴욕 스토리(서울문화사, 전 3권)’가 나왔다. 서른 두 살, 만화가로서 정식 데뷔였다. “엄마, 나 숨을 못 쉬겠어” ![]() 무엇보다도 혜원씨의 하루는 너무 바빠서 연애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턱없이 낮은 고료로 단행본 작가로만은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영어과외를 투잡으로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과 그에 따른 준비, 작품에 쏟는 시간, 개인적인 영어 스터디까지 합치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지금은 결혼과 관련한 어머니의 잔소리가 많이 줄었지만, 서른 즈음에는 결혼하라는 성화가 엄청나셨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작정을 하신 거지. 들들 볶기 시작을 하는데, 오늘은 누구 선봐라. 내일은 누구 선봐라. 내 인생 내가 살게 놔두라고 화도 내고…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내가 A형이거든요. A형은 열 받으면 참고 있다가 어느 순간 한 번에 잘라버려요. 여행 갈 준비를 다 끝내놓고, 엄마한테 말했죠. 나 내일 유럽 가. 영국으로 가서 엄마한테 전화를 하니까 엄마가 ‘시집 가란 말 안 할 테니까 빨리 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6개월 후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과호흡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간 것이다.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된다구요?” 의사의 말을 일부러 엄마가 들을 수 있게 크게 반복해서 되물었다. 그 이후로는 결혼하라는 성화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캐릭터를 만드는 게 즐거워요 ![]() 디자인에 대한 애정도 이야기 안에서 풀어내고 있다. 혜원씨가 연재한 두 타이틀-불량천사의 뉴욕스토리, 소다팝- 모두 패션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리면서 등장인물들의 의상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아이디어의 원천에 대해 묻자 혜원씨는 자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같이 영어 스터디하는 모 대기업 직원에게 문화인프라에 투자해야 된다는 얘기를 했더니 단번에 돌아오는 대답이 ‘그럼 뭐가 나오는데’ 라는 거였어요.” 휴대폰이나 IT기술처럼 확실하게 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열이 받았죠. 이번에 쓴 동화도 그 사람에게 복수(?)하는 의미로 만든 내용이에요. 하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혹은 세수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그렇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만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기 위해서다. 지적을 받으면 마음 상해하기 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고쳐야 할까를 주로 생각한다는 혜원씨를 보고 있자니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화를 나누던 중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진 혜원씨의 책으로 시선이 갔다. ‘한국의 도깨비’에 관한 책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차 읽고 있는 것이라 했다. 인터뷰 내내 혜원씨에게서는 경제문제, 여행, 국내의 문화정책, 인터넷 상의 저작권 문제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친 말들이 쏟아졌다. 혜원씨가 가진 호기심의 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화하는 사람들은 가끔 한가지 세계에만 몰입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만화를 좋아하니까 만화만 파고든다는 거죠. 하지만 아는 게 적으면 나오는 것도 적다고 생각해요.” 풍요로운 만화를 그리기 위해 풍요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혜원씨는 오늘도 호기심의 끈을 팽팽히 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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