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유행’

한 철을 풍미했던 무스탕을 보며

문이정민 | 기사입력 2005/02/28 [22:26]

무서운 ‘유행’

한 철을 풍미했던 무스탕을 보며

문이정민 | 입력 : 2005/02/28 [22:26]
한때 무스탕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입어보면 몸 전체가 묵직할 정도로 무거웠던 그 옷은 값도 무척 비쌌고 별로 실용성이 없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집에서 하나쯤은 사둬야 할 필수품처럼 유행을 탔다. 그러나 불과 1~2년 만에 유행은 지나갔고, 무스탕을 위해 희생된 수억 마리의 짐승들의 털가죽은 각 가정의 케케묵은 옷장 깊숙이 묻히게 됐다. 한철 유행을 위해 그 많은 동물들이 사육되고 희생되고, 결국 버려지게 되었으니 참 ‘무서운 유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행’이라는 것. 청바지 허리라인이 배꼽 위냐 아래냐, 핸드폰의 화면이 흑백이냐 아니냐, 코트의 어깨 선이 넓은가 아닌가 등등의 기준이 유행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런 기준으로 유행에 뒤쳐진 구식이 결정되고, 구식은 가차없이 쓰레기가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청바지 허리라인이 배에 걸리는지 골반에 걸리는지에 따라 왜 입을 수 있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이 구분되어야 하는지 납득할만한 근거가 없다. 사실 유행이라는 것에 근거는 없다.

소비사회가 창출해낸 고도의 상술은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를 조장한다. TV나 각종 잡지, 모든 매체에서 ‘보여지는 것’들은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는 신조어를 만들며 퍼져나간다. 모두가 맞춤옷이라도 입은 듯한 거리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국의 유행중독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다. 유독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유행에 뒤쳐지는 것은 능력결여로까지 읽히기도 한다. 겉모습이 매력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칫 ‘촌스럽다’는 평가는 감각이 떨어지고, 게으른 사람이라는 낙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유행을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느끼는 변화의 욕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욕구는 정말 자신의 욕구일까. ‘올 봄은 연두가 유행이다’라는 선언에 맞게 모든 진열장에는 연두 빛이 넘실대는 가운데 행해지는 소비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선택인가. 아주 사소한 색상의 차이만으로도 소비를 충동질하는 현란한 상술로부터, 시각적인 유혹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막상 유행이 지나면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이던 색상도 순식간에 퇴색해버리는데도 우리는 번번히 유행이라는 덫에 빠진다.

어떻게든 차이를 극대화하며 소비를 현혹하는, 개개인이 느끼는 변화의 욕구마저 짜여진 각본의 틀로 밀어 넣고 마는 ‘무서운 유행’들. 반드시 상기해야 할 점은 그 천편일률적인 ‘변화’를 따라가려면 끊임없이 자신도 모르는 ‘낭비’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무기력하게 옷장에 박혀있는, 한때는 백 만원을 호가하던 무스탕을 보면서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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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urin 2005/03/05 [17:39] 수정 | 삭제
  • 아이고~. 말도 마세요.
    동물 학살 동영상 보다가 토할 뻔 했어요.
    너구리였던것 같은데 산채로 껍질을...
    너무 참혹해 보다 말았습니다.
  • 키스 2005/03/01 [12:17] 수정 | 삭제
  • 대단한 유행이었죠...
    싸게 파는 곳 찾아서 다들 한 벌씩은 마련했으니까요.
    비싼 옷은 평소에 절대로 안 입는다는 주의인 사람들까지도...
    딸들은 엄마에게 무스탕 한 벌 정도는 사드려야 한다는..
    그래서 저도 엄마를 위해 몇 달 치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서
    자랑스럽게 한 벌 사드렸었는데..
    그 다음 해에 유행이 지나서 못 입게 되셨죠.
    엄청 낭비인 셈이죠.. 국가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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