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신성한 교육의 공간이다, 라는 생각은 경험적으로 별로 맞지 않다. 내게 학교라는 공간의 기억은 ‘돈’의 권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부당한 공간이었다.
중학교 때, 반장선거. ‘민주주의 원칙을 실현코자’ 마련된 선거에서는 상위 5등 안에서 반장후보가 결정됐다. 반장으로 선출된 친구는 나와 친한 친구였다. 공부도 잘했고, 학급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친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친구의 집은 가난했다. 담임선생님은 명색이 학급 반장인데 각종 행사에 재정적 후원은 고사하고 등록금마저 내지 못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워 했다. “너 학비가 두 달이나 밀렸어”라고 공개적인 망신을 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보다 못한 내가 교무실로 찾아가 그 친구의 가정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면박을 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교사 개인의 인성문제로 치환하기에는 학교 시스템이 내재하고 있는 부당함은 너무나 컸다. 학교는 돈을 원했다. 고등학교 때 ‘육성회’라는 것이 있었다. 정확히 육성회가 뭘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저 ‘치마바람’ 제법 휘두르는 부모님들의 모임 정도로 각인돼 있다. 담임이 정한 몇몇 학생들의 부모로 이뤄진 육성회는 체육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서 학생들에게 빵이나 요구르트를 나줘 주거나 가끔 야간자율학습에 사용되는 학습지 비용을 내거나 하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명목의 학교 발전기금을 내기도 했다. 교육환경을 생각하는 학부모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사립학교에서 육성회의 역할은 너무나 학교측의 요구에만 충실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애초에 돈 없는 집은 육성회 참여는 가당치도 않았다. 그러니까 육성회란 까놓고 말하면 돈 있는 집안 극성 부모들의 집합 같았다. 그것이 학교의 이익에도 정확히 부합했다. 여기 저기 촌지가 사회문제로 각인되면서 직접적으로 교사들에게 돈봉투를 들이미는 부모들을 줄어갔지만, 육성회의 경우 버젓한 명분을 갖고 학교측에 재정적인 후원을 했다. 육성회의 경우 학급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나름대로는 상위 몇 프로 안에 드는 학생들의 부모들로 이뤄지는 것이 정례였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규칙과 상관없이 어느 정도 재정적인 여건이 되는 부모들로 구성됐던 것 같다. 부모들은 그것이 자식들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학교는 나날이 재정적인 자원을 확보해갔다. 담임이 첫날 들어와 “너는 반장, 너는 부반장”이라고 외치던 학생들은 돈이 있는 집의, 그러니까 육성회를 할만한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그렇게 되면서 학생회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리고 육성회 부모들의 자녀들은 자연스레 교사의 주목을 받았다. 이미 머리가 커버린 학생들의 학교측의 ‘구린’ 거래에 대해 다 안다는 듯 눈을 감았다. 학교 측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것은 학교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학생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아직 현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의 발전이란, 학생교육을 위한 편의란 무엇일까. 학생들은 먼저 알아간다. 돈이 없다는 것, 돈이 없는 부모를 가진다는 것이 무능력과 자연스러운 배제의 순서를 밟게 되는 시작이라는 것을. 돈이 없다는 것은 학생 개인의 능력이 있어도 알아서 물러나야 하는 전제고, 능력보다 우선하는 결격사유라는 것을. 그것은 얼마나 교육적일까. 사회에서 마주칠 차별에 먼저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것일까. 그것이 냉혹한 사회의 논리이며 저항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듯 학교의 시스템은 너무나 견고하다. 학교란 역설적이게도 ‘권력’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만드는 핵심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학교라는 공간이 차별에 저항하고 사회의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평등한 공간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까.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학교란 무슨 소용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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