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지 않은 연애소설

여성문학 시리즈 5 - 20세기 여성작가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5/03/28 [17:01]

달콤하지 않은 연애소설

여성문학 시리즈 5 - 20세기 여성작가

김윤은미 | 입력 : 2005/03/28 [17:01]
달콤한 연애이야기는 소녀독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아이템 중 하나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돌려보던 제목조차 헷갈리는 수많은 하이틴로맨스들, 그리고 순정만화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판타지와 현실은 지극히 다르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연애는 그렇게 달콤하지도 않고 신데렐라처럼 요란한 신분 상승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연애는 씁쓸한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낯설고 고통스런 경험이다. 그 경험은 성장의 단초를 제공하여 소녀들을 ‘어른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어디에도 안정적으로 안주할 데가 없다는 삶에 대한 환멸 또한 제공한다.

그런데 현실의 연애 이야기를 여성작가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쓸 수는 없었다. 성에 대해 표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금기시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혹은 연애에 대해 쓴다 하더라도 그 작업이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필요했다. 서구의 경우 대략 1960년부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이성애 연애관계를 재구성해 낸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로렌스(D.H.Lowerance)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판금조치에서 풀린 사건은 성과 연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시작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 리스와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

▲ 진 리스의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의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재구성한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1976, 원제: Wide Sargasso Sea)로 유명해진 진 리스. 버사 메이슨은 진 리스의 손을 통해 민감하고 다정다감하며 성적 매력이 풍부하지만, 자기 패배적인 경향이 있고 의존적인 여주인공 앙뜨와네트로 재탄생한다. 진 리스는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 뿐 아니라 여러 소설을 통해 의지할 곳 없는 아웃사이더의 처지에 놓인 여성이 보호를 바라며 자신보다 나이 많은 유럽의 남성에게 의존했다가 버림받는 테마를 다루었는데, 이는 그녀의 애정관계의 핵심적인 경험을 반영한 결과다.

진 리스는 그 어머니가 앙뜨와네트처럼 크리올계(흑인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의 후손이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는데, 이 민감하고 예민한 기질은 소설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녀는 “언제나 공간을 생각했다-햇빛이 비치는 거리에 있는 집의 어두운 그늘이나 혹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보랏빛 바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한편 로체스터가 ‘적의를 띤 녹색’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도미니카의 험하고 야성적인 지형은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어린 그녀는 주변 흑인들의 강인한 생활력에 찬탄하곤 했는데, 이는 <광막한 바다…>의 크리스토핀과 같은 강인하고 현명한 흑인여성 캐릭터에도 나타난다. 비록 흑인 커뮤니티와 동질감을 찾는데 실패한데다가 17세에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 뒤에는 단 한번 밖에 도미니카를 방문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늘 도미니카가 아닌 다른 곳에 대해 이질성을 느꼈으며 특히 영국에 대해 차갑고 혹독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진 리스는 결혼과 경제적 문제에서 모두 곤혹을 겪으면서 살았다. 29살에 그녀는 장 레글렌드와 결혼했지만 궁핍에 시달리며 떠돌이처럼 유럽을 전전했다. 한편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독려한 포드 매독스 포드는 그녀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녀를 유혹했다. 당시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 있던 상황인 데다가 정신적으로 취약했던 진 리스는 포드와 연애관계에 빠지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남편과 이혼까지 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결혼 후에 유혹을 당하거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낙태하는 여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서 부유한 남성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자의 이야기처럼 불행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써냈다.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는 작가로서 이름이 거의 잊혀진 상태로, 알콜 중독에 빠지고 잦은 싸움으로 감옥에 갇히는 등 불안정하고 가난하게 살아왔던 76살의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명예와 부를 안겨준 회심의 역작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제인 에어>를 보면서 “버사에게 삶을 써주고 싶다”고 갈망했다. 19세기 초 영국인과 결혼한 뒤 미친 여자가 된 크레올 여성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그녀의 열망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크레올들이 유색인종의 피 때문에 게으르고 관능적이며 퇴폐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로체스터가 앙뜨와네트를 바라보는 시선에 그대로 드러난다.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는 일차적으로 <제인 에어>라는 소설 속에서 불길한 괴물에 불과했던 광녀 버사 메이슨, 혹은 앙뜨와네트의 삶을 재구성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형상화는 도식적이거나 교훈적인 어조에서 끝나지 않는다. 로체스터는 앙뜨와네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지만 그녀의 성격이나 감정,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막연하면서도 맹목적으로 혐오하고 불신한다. 한편 유년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지냈던 앙뜨와네트는 로체스터에게 감정적으로나 성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그가 감정적으로 학대하고 제멋대로 굴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진 리스는 의존과 집착, 배신의 테마를 통해 소녀였던 앙뜨와네트가 어른이 되는 동시에 미쳐가는 과정을 비극적으로 그려냈다.

아일랜드 소녀들의 연애와 결혼

▲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The Country Girls Trilogy'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The Country Girls Trilogy'(1960~1964)는 연애와 자유에 대한 환상을 품고 도시로 탈출하는 소녀 케이트와 바바의 이야기다.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들의 환상과 사랑에 대한 환멸, 아일랜드의 보수적인 사회상을 선명하게 드러낸 작가다. ‘시골소녀’ 3부작(한국에는 두 권만 <아일랜드의 봄>과 <파란 눈의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과 그 외 일곱 권의 책은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더불어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아일랜드 사회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처럼 아일랜드에서 금서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아일랜드 사회는 이후 급속도로 변모한다. 1986년 에드나는 “사람들은 내 책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제 아일랜드에 가면 사람들은 나에게 예의 바르게 대한다. 비록 뒤에서는 나를 중상할 지라도…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사람들은 내 소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내 소설이 촌스럽다고 여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확실히 ‘시골소녀’ 3부작의 케이트와 바바는 세련된 여자가 되고자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미숙하고 상처 받기 쉬운 면모를 지닌, 소위 ‘쿨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케이트의 가정사는 한국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아버지는 술에 절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빚을 지며 살면서도 다정다감한 인물로 인정 받기를 원한다. 몇 주에 한번씩 돈을 다 쓰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날은 어머니와 케이트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다.

어머니가 어이없이 죽은 후 케이트는 그녀를 숙맥으로 여기고 못살게 구는 여자친구 바바와 함께 수녀원으로 떠난다. 수녀원은 매우 엄격하고 딱딱한 곳으로 식사마저 부실하여 황량하기 짝이 없다. 결국 그녀들은 수녀원 화장실에 수녀와 신부가 성교를 했다는 야한 농담을 써서 강제로 쫓겨나는 길을 택한다. 한편 케이트는 ‘미스터 젠틀맨’이라 불리는 유부남과 연애에 빠지지만 결국 맥없이 헤어진다.

도시로 떠난 케이트와 바바는 낯선 남자와의 짜릿한 로맨스를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객기 가득한 이 소녀들의 모험은 소득이 신통치 않다. 원나잇 스탠드를 위해 클럽에서 만난 남자들은 추잡한 농담을 걸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날 케이트에게 그녀가 고대하던 이상형에 근접한, 로맨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유진 게일라드가 나타난다. 그러나 유진 게일라드 역시 유부남이었다. 그는 케이트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들과의 인간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이를 비난하는 케이트에 대해 오히려 ‘참을성이 없는 젊은 여자’라고 맞받아친다. 그녀가 매혹됐던 그의 냉정함과 무심함, 어른스러움은 결코 그녀에 대한 완전한 배려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번복하면서 결국 결혼하게 되지만 불행하게 끝난다.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실패를 경험한 여성의 쓰디쓴 느낌을 잘 포착한다. 소녀의 모험과 성장은 결국 판타지와 현실의 괴리를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홀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끝이 나는 셈이다. 그런데 그녀의 소설은 단지 씁쓸하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브라이언은 코믹할 정도로 가볍고 산뜻한 어조를 통해 케이트와 바바가 겪는 일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추운 날 미스터젠틀맨과 첫 키스를 하는 와중에 케이트의 코에서 콧물이 난다던가, 하숙집에 찾아온 유진 게일라드를 접대하면서 케이트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피우던 담배꽁초를 옷 속에 떨어뜨리는 에피소드들은 사소하지만 유쾌함과 현실감, 생생함을 동시에 전달하는 강력한 효과를 낸다. 케이트의 연애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와 바바의 질투, 유진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끙끙 앓는 케이트의 모습 등을 얼기설기 엮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오브라이언의 솜씨는 그녀가 탁월한 이야기꾼임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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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aeng 2008/07/31 [10:35] 수정 | 삭제
  • 연예와 연애의 차이점을 모르십니까. 웃기다님이 더 웃기십니다.
  • 웃기다. 2005/04/04 [15:58] 수정 | 삭제
  • "오히려 연애는 씁쓸한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낯설고 고통스런 경험이다. 그 경험은 성장의 단초를 제공하여 소녀들을 ‘어른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어디에도 안정적으로 안주할 데가 없다는 삶에 대한 환멸 또한 제공한다.""

    ====> 기자 본인의 기억에는 연예라고하면 낯설과 고통스러울지는 몰라도, 왜 일반화하는지 모르겠네요. 기자라는 직함과 기사라는 이름을 붙히려면, 좀 제대로 기사쓰면 어디가 덧날까요??

    차라리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연예는 씁쓸한 ~~~" 이런식으로 썼다면 좀 봐줄 만할텐데, 스스로의 편견을 보편화된 진실처럼 기사 서두에 붙혀쓰다니, 좀 오바했네요.
  • 로즈 2005/04/01 [01:51] 수정 | 삭제
  • 멋진 일이네요.
    버사 메이슨의 부활이라니...
    좀 무섭기도 하지만.
    제인에어에서 버사 메이슨의 존재는 미묘하고 이상했어요.
    배경이 음침한 면이 있긴 하지만 광녀의 등장이라니...
    그녀에 대한 상상이 발동해서
    소설의 내용인지 나의 상상인지 모를 인물로 기억되고 있죠.
    훨씬 적극적인 상상으로 페미니즘적 색채를 입힌 작가가 있었다니..
    진 리스의 소설 찾아보니 절판된 것 같은데 흑..
    꼭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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