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지우고 싶은 경험들

여성문학 시리즈 6 - 한국 여성성장소설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5/04/04 [15:30]

성장, 지우고 싶은 경험들

여성문학 시리즈 6 - 한국 여성성장소설

김윤은미 | 입력 : 2005/04/04 [15:30]
여러모로 소설은 여성에게 친숙한 장르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탄생할 때부터 세계를 파악하는 작가 개인의 감성적인 능력을 중시했던 까닭에, 남성에 비해 감성적인 능력이 우세할 것이라고 인식되는 여성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다. 한국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여타 예술 분야에 비해 소설 장르에 여성작가들이 많고, 작가 지망생들 중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현상도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소설의 ‘정전’들 가운데 여성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럴 듯하게 그려낸 소설을 찾기란 힘들다. 이는 여성의 성장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이란, 낯선 세계와 대면하여 궁극적으로 세계와 타협하면서 힘을 획득하고 이상을 성취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성들 가운데 자신의 이상을 성취한 여성들은 대부분 특수한 위치에 처해 있어서 여성 집단의 공통된 이야기로 끌어내기 어렵다.

여성독자들이 읽으면서, “아, 이 이야기야 말로 공감이 간다”는 반응을 보일 법한 여성 성장소설들은 성장을 '힘을 성취해가는 과정'으로 그리지 않는다. 성장의 경험은 지우고 싶고, 숨기고 싶은 외상적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진 리스의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에 등장하는 앙뜨와네트처럼 성장하는 동시에 미쳐가는 주인공이 있다. 물론 여성의 성장 이야기가 일관된 패턴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경험은 시기마다 각기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해 있다. 특히 페미니즘 운동의 확장으로 인해 여성들의 성장 이야기는 보다 탄력을 받게 되어, 세상을 향해 냉소를 던지고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챙기는 여성 주체들이 등장했다.

오정희의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

“부네, 나는 그녀를 한 번쯤 본 듯도 하고 전혀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창호지 한 겹 너머 문의 안쪽에서 숨쉬고 있는 그녀를 생각할 때면 이상한 두려움과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슬픔에 잠기곤 했다. 나는 이러한 감정을 달래듯 풋감을 또 하나 주워 씹었다. 떫은 단맛이 위로처럼 따뜻하고 축축히 목안으로 차올라 나는 이유 모를 감동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오정희의 <유년의 뜰>)

▲ 오정희의 <유년의 뜰>  
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정전’ 소설들 가운데 여성독자들과의 감정적 친화력이 강한 소설로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탄탄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의 빈곤한 일상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가 빛난다. 사실 내용으로 따지면 극적인 사건이 없는, 일상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주인공 소녀 노랑눈이의 눈에 투영된 인상적인 풍경들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밤마다 화장을 하고 거리로 나선다. 어머니와 싸우고 동생들을 자주 매질하는 폭력적인 오빠는 미국으로 가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고 “홧 아유 두잉?” 같은 영어 문장을 어설프게 연습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노랑눈이는 엄마의 돈을 자주 훔치고 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모자라는 아이’로 자라난다.

나사 몇 개가 빠진 듯 삐걱대면서 살아가는 노랑눈이 가족의 풍경은 단편 <중국인 거리>로 이어진다.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석탄 가루 풀풀 날리는 마을의 풍경에는 전쟁이 끝난 후 막 정착을 시작한 하층민들의 고단함이 배어난다. ‘중국인 거리’로 이사 온 ‘나’는 위층에 사는 화려한 분위기의 ‘양공주’ 매기에게 은근히 부러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나’의 친구 치옥이는 “난 커서 양갈보가 될꺼야”라고 단호하게 선언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들의 우상 매기는 상대 미군에 의해 갑자기 죽음을 당한다. 삶의 모델로 삼을 만한 여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녀들은 아기가 “여자의 벌거벗은 두 다리 짬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온다는 것”쯤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웃자란 의식의 소유자로 자라지만 그 내면은 약하며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낯설고 불안한 성에 대한 자각은 ‘나’의 웃자란 성장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유년의 뜰>에서 노랑눈이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것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가 아버지에게 붙들려서 옷을 벗기우고 감금된 여자 ‘부네’에 대한 상상이다. 마을의 유부남과 ‘정분’이 났다가 머리채를 잡히는 노랑눈이의 어머니, 한때 기생으로 아직도 고운 몸을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 <중국인 거리>에서 ‘나’와 치옥이의 우상이었던 ‘양공주’ 매기의 이미지들은 그 어떤 감춰짐 없이 과감하다.

▲ 이명랑의 <꽃을 던지고 싶다>  
<꽃을 던지고 싶다>는 1990년대 등장한 여성소설 가운데 상당히 눈길을 끈다. <유년의 뜰>의 노랑눈이는 주변과의 접촉에서 겪게 되는 낯선 경험들을 상처로 인식하고 안으로 침잠하는,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고전적인 여성주체에 가깝다. 이와는 달리 <꽃을 던지고 싶다>의 주인공 이량은 거침없이 투덜거릴 줄 알며, 불쌍하게 보여서 착한 아이로 보이는 것을 싫어하고, 악착같이 세상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현대적인 여자다. 페미니즘의 영향도 영향이거니와, 묵직한 현대사를 짊어진 전 세대에 비해 가뿐하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서 <꽃을 던지고 싶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마저 가뿐하게 넘겨버리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발랄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현실에 밀착된 소녀의 서사를 구성한다.

소설은 죽음 직전에 놓인 아버지의 나체가 불러일으키는 생경한 감정을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주인공 이량은 축 늘어진 아버지의 성기를 보면서 느낀 감정에 대해, “어딘가 남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그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유년시절도 마찬가지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엉킨 경험 그 자체. 이량이 사는 곳은 철마다 바뀌는 과일로 계절을 헤아리는 영등포 시장이다. 그곳에는 과거에 ‘양공주’였던 화장실 관리를 하는 할머니가 있고, 딸기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과일가게 아주머니들이 있고, 카바레에 몰래 춤을 추러 나가는 여자도 있으며, 옷을 벗고 돌아다니다가 학교 사내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미친 년’도 있다. 낯설고 불온한 성적인 이미지가 가득한 이런 풍경은 <유년의 뜰>의 공간과 그렇게 멀지 않다.

“여자들은 모두 이상하다. 매를 맞아도 자식이 더 소중한 걸까? 망치를 들고 때리려는 남편, 송곳으로 찌르는 남편, 술주정뱅이 남편, 그런 건 모두 견뎌 내도 자식 없이 사는 건 못 견뎌 내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왠지 그런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나도 매 맞고 사는 여자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량의 눈에 비치는 여자들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성장의 전범으로 삼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좌충우돌하면서 스스로 커간다. ‘날라리’ 이희선에게 포르노잡지를 빌려보고 담배도 피워보는 등 ‘날라리’ 흉내도 내보고, 친구 경진과 풋과일 같은 연애를 했다가 쓰라린 이별을 겪고, 잘생긴 정육점 처남 아저씨에게 성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가 어이없이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긴 일련의 경험들을 거쳐 또래보다 어른스러워진 이량은 어떻게든 시장바닥에서 벗어나 잘 살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유년시절을 지우기 위해 애쓰면서 지내지만, 종국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좋건 싫건 간에, 현재의 자신을 만든 결정적인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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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김지은 2005/07/07 [10:28] 수정 | 삭제
  • 늘 좋은 글 재밌고 감사하게 잘 읽고 있어요.
    아들의"홧아유두잉"은 어설픈 영어연습이라기 보다
    엄마를 향한 이중적 의식을 드러내는 장치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화장대 앞에서 화장하는 엄마를 향한 발언이죠.
  • 2005/04/07 [02:28] 수정 | 삭제
  • '매기'언니 아니었던가요? 매기 언니의 딸이 제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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