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 레아주라는 가명의 저자가 쓴 에로티즘 소설 ‘O의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4년 프랑스 문학계의 저명한 여성 도미니크 오리가 자신이 폴린 레아주였다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O의 이야기’의 지은이의 성별이 여성이 아닌 남성일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지은이의 성별이 여성이 아니라고 추측한 사람들은 이야기 자체가 남성의 성적인 환상에 기반하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성이 그처럼 대담한 에로티시즘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티즘 문학의 경계
그러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이므로 긍정하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여성은 에로티즘 문학을 쓰기 어려울 것이며, 쓸 경우 부도덕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비난을 남성보다 더 많이 들어야 했던 사회적 편견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티즘 문학의 경계는 상당히 희미하다. 일반적으로 보다 시적인 어투에 감정들이 묻어나는 분위기를 풍기는 문학은 에로티즘이고, 기계적이고 노골적인 장면 묘사에 치중할 경우 포르노그래피 문학으로 분류되어왔다. 그러나 시적인 어투라고 해서 성적인 묘사를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경우, 두 장르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티즘 문학은 즐거움을 표방하지만 포르노그래피문학은 성매매에서 기인한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의견 또한 다분히 유토피아적인 로맨스 환상에 기반하고 있으며, 여성의 다양한 상상력과 포르노그래피 문학에 대한 개개인 여성의 선호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 받는다. 성과 사랑에 대한 여성의 탐색과 모험 여성이 쓴 에로티즘 문학의 선구자이자, 대표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아나이스 닌이다. 1903년에 태어난 그녀는 유럽과 영국을 오가며 헨리 밀러, 오토 랑크와 같은 당대의 지성과 교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소설은 1960년대 뉴웨이브 페미니즘이 태동했을 때, 주체적이고 해방적인 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하지만 그녀처럼 성적인 자유를 추구했던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불행한 사태를 맞이했다). 또한 여성예술가는 여성들의 축적된 경험을 통해 남성과는 다른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그녀의 주장은, 여성들만의 예술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 시대의 이념과 잘 맞아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녀 자신은 제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면서 내밀한 자아의 해방을 주창한 편이었지만, 여성들이 창조하는 예술을 긍정하고 찬양했던 까닭에 많은 여성들이 그녀를 참조했다. 아나이스 닌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같은 소설들을 쓰게 되었을까. 사실 아나이스 닌은 소설보다 일기작가로 더욱 유명하다.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을 길렀던 까닭에 그녀는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아나이스 닌의 일기 <헨리와 준>(이 일기는 필립 카우프만 작의 동명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한국에는 ‘북회귀선’으로 번역됐으나 소설 <북회귀선>과는 상관이 없다.), <화석의 나라>(원제: Beauty's Punishment)나 <델타 오브 비너스>, <모델>과 같은 작품들은 주인공의 성적 모험에 충실하며,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성행위 묘사가 많은 에로티즘 소설들과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준다. 여기서 그녀의 문학적 지향을 살펴볼 수 있다. 헨리와 준, 그리고 아나이스
“나는 그녀를 뒤쫓고 있다”는 아나이스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준에 대해 느낀 심정을 잘 알 수 있다. 준은 위대한 소설가로 보이는 헨리에게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그를 아이 다루듯 한다. 준이 갑작스레 떠난 후 아나이스는 헨리와 사랑에 빠지는데, 연애를 하면서 그녀는 남편이나 자신의 상담의 알렌디 등 주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흐르는 애정과 관능, 상대를 지배하려는 속성에 대해 민감하게 통찰한다. 또한 여성에게 주어진 수동적인 역할 대신 스스로 쾌락을 획득하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지금부터 열정과 쾌락과 소음과 술 취함과 그 모든 악한 것을 다 해보고 싶다.” 그녀의 일기가 보여주는 여자 둘, 남자 하나의 구도는 상당히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나이스는 헨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준에 대해서도 압도된 상태다. 그녀는 준에게 질투를 느끼면서 꿈속에서는 그녀에 대한 성적인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준의 존재감에 눌린 채 아나이스와 헨리는 사랑을 나누는데, 아나이스는 처음에는 엄청나게 위대하게 보였던 그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어린아이 같다고 느낀다. 결과적으로 아나이스는 준을 이해하게 되며, 자신이 준에게 가까워지고 있음을 자각한다. 연애를 통한 성장이자, 여성을 모델로 삼은 성장인 셈이다. 급작스레 준이 다시 돌아오자 헨리를 사이에 놓고 아나이스와 준은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다. 헨리는 두 여자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못하는 상태다. 준은 아나이스로부터 헨리를 되찾고 싶어하는 동시에 아나이스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싶어한다. 아나이스는 이들 둘 모두를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우리 세 사람이 벌이고 있는 이 굉장한 게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가 악마인가?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누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이 같은 묵직한 질문을 던지면서 괴로워한 끝에 그녀는 자신이 현실에 눈을 떴다고, 고통을 상실한 성인의 상태로 변화했다고 고백한다. 에로티즘 문학과 페미니즘
하지만 아나이스 닌의 그 같은 표현들을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다. 성행위 자체는 포르노그래피적 문학의 관습대로 묘사하되 중성적인 여성 인물이나, 병약하거나 성적으로 불구가 된 남성 주인공을 내세워서 포르노그래피의 관습을 패러디해 여성의 성을 보다 복잡하고 깊게 탐색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패러디가 과연 원본-남성적인 포르노그래피의 관습에서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는 애매하다. 1960년~70년대에 영미권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여성의 성적 모험을 다룬 이른바 ‘페미니즘적인’ 에로티즘 문학들은 그 원류를 아나이스 닌에서 찾는다(물론 에리카 종을 비롯한 현대작가들이 쓴 에로티즘 소설들은 현대를 배경으로 결혼, 이혼 등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아나이스 닌의 것과는 분위기가 판이하다). 아나이스 닌은 그녀의 일기를 남편이 사망한 이후인 63세가 되어서야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대중의 보수적인 시각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20세기 후반 서구 여성문학의 성적인 표현 자체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개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문학적 표현에서 가능한 논의이지, 실제 생활에서의 성차별이나 종속적인 지위가 그만큼 더 향상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에로티즘 문학이 페미니즘적이다/아니다’ 라는 다소 소모적인 논쟁구도보다는 오히려 아나이스 닌의 작품이 보여주는 성과 사랑에 대한 여성의 탐색과정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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