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二等) 국민을 넘어서

호적제도의 피해들 국가가 책임져야

이이내 | 기사입력 2005/04/18 [21:21]

이등(二等) 국민을 넘어서

호적제도의 피해들 국가가 책임져야

이이내 | 입력 : 2005/04/18 [21:21]
지난 14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는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실 주관으로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이 주최하는 “호적제도 피해사례 증언대-이등(二等) 국민, 신분등록제를 말한다”가 열렸다.

노회찬 의원의 인사말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여성학자 조주은씨(어머니급식당번폐지를위한모임 대표, <현대가족이야기>의 저자)의 모두발언 “호주제 폐지 이후 우리 사회 가족을 말한다”와, 사례 발표 "이등(二等)국민, 신분등록제를 말한다", 그리고 자유토론 "다양한 가족 구성원과 목적별 신분등록제"로 이어졌다.

이번 증언발언대는 호주제 폐지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호주제 폐지 이후 신분등록제도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혈연 밖의 가족을 인정하라!

조주은씨는, 여성부가 호주제 폐지의 당위를 주장하며 내걸었던 캐치 “가족을 지키는 것은 호주제가 아니라 사랑입니다”와, 포스터에 등장하는 ‘가족’ 은 “이성애 중심의 정상가족을 의미한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또 “호주제가 정상가족 강화에 이바지해온 만큼, 호주제 폐지 이후 법제도는 이성애중심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주은씨는 호주제 폐지는 “호적에서 호주라는 용어를 사라지게 하고 가족의 개념을 양성 평등하게 양계로 확장”했지만, “혈연이 아닌 이들은 여전히 가족이 될 수 없음을 ‘공고히 선언’하여 호주제 폐지의 의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주은씨는 또 일부일처제에 기반을 둔 배타적인 속성을 지닌 ‘배우자’ 개념은 재정의되어야 하고, 다양한 가족이 실질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게 ‘상속법’과 ‘세법’이 개정되어야 하며, 아울러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는 관행에도 반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호주제가 폐지되었다고 축배를 들기에는 미해결된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얘기였다.

연금, 수당, 보험, 휴가, 수급권 등에서 배제

호적제도로 인한 피해사례로는 성소수자와 장애여성, 그리고 한부모인 여성가장의 사례가 발표됐다. 최현숙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중앙위원은 수년간 파트너와 실질적으로 결혼 생활을 해 온 남성동성애자 여기동씨가 국민연금, 배우자수당, 의료보험, 가족경조사휴가, 아우팅, 상속 등에서 겪은 차별을 이야기했다.

또 사실혼 관계를 인정 받지 못하고, 위급한 순간에도 파트너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하며, 해외 이주 시에도 파트너로서의 권리를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등 여러 피해를 입어 온 여성동성애자들의 사례를 들면서, 가부장제와 호주제의 공모를 비판했다.

장애여성공감의 박영희씨는 애써 단독 호주가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아버지와 남동생의 피부양자로 남을 수밖에 없고, 부양자인 아버지와 남동생의 경제능력 정도에 따라 수급권자로서의 자격 여부가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호소했다. 또 본인이 충분히 의사결정 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대출문제에 있어서도 반드시 보증인을 요구하는 은행의 태도, 자신이 가족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보험을 승계하려고 해도 절차가 너무나 까다로운 실태 등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민주노동당 구로을 지구당의 김미숙씨는 전 남편과 이혼한 후 모자원 생활경험과 취직을 위한 면접시험 경험 등을 털어놓으면서, 한부모 여성가장과 한부모 가족에 대해 “결핍된 ‘무엇’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미숙씨는 어느 날 자모원의 영어 명칭이 ‘fatherless family's home’(아버지 없는 가족들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또 면접관이 ‘여성가장’이라는 점이 기재된 자신의 이력서를 보고 직업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대신 사적인 질문들만으로 할당된 시간을 채워버려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경험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김미숙씨는 일반적인 이력서 서식에서 호적관계를 기입하는 란만 사라져도 그런 상황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로운 신분등록제: 목적별 편제로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의 타리씨는 호적제도로 인한 피해사례에서 대안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신분등록제의 틀로 ‘공동행동’이 제시하고 있는 목적별 편제 방식을 소개했다. 목적별 편제 방식은, 법무부 신분등록제 안이나 대법원 안과는 달리 본적 기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가족관계 증명을 통한 본인증명 방식이 아닌 지극히 본인 위주의 신분 증명만 가능하게 한 양식이다. 이는 정상가족 중심의 서식 규정과 국민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봐왔던 국가의 과도한 정보 수집을 지양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타리씨는 주장했다.

호적제도로 인한 피해사례들은 모두 새로운 신분등록제가 이러한 차별들을 시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새로운 신분등록제를 모색하는 지금 이제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을 또 다시 이등 국민의 위치로 밀어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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