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입시경쟁으로 내몰린 학생들 위한 ‘촛불추모제’

박희정 | 기사입력 2005/05/10 [03:50]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입시경쟁으로 내몰린 학생들 위한 ‘촛불추모제’

박희정 | 입력 : 2005/05/10 [03:50]
청소년들이 거리에 나왔다.

지난 7일 토요일 저녁 6시경, 광화문 교보문고 앞 인도에는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험부담과 학교폭력 등으로 자살한 학생들의 추모제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언론 등을 통해 ‘내신 등급제 반대집회’로 부각되면서 교육부는 학생들의 집회 참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불법집회 참가 시 징계’하겠다는 방침을 내걸기도 해 문제가 됐다.

추모제 당일, 61개 중대 6천여 명의 경찰병력이 배치되는 등 광화문 거리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서울시 교육청은 장학관과 일선 교사 8백여 명을 집회 장소와 연결되는 지하철 역, 버스정류장 등에 배치되어 시위 참가 학생들의 귀가를 설득하도록 했다.

교육현실에 대한 다양한 비판 쏟아져

행사 주최와 준비는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참여한 학생들 대부분은 인터넷과 핸드폰 문자 등을 통해 정보를 나누고 자발적으로 모여든 경우였다. 다수는 새로 도입된 입시 정책의 1세대가 되는 고1학생들이었으며, 재수생을 포함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의 모습도 보여 이들의 관심이 단순히 “내신등급제 반대”에 머물고만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집회 동안 이어진 학생들의 자유발언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추모사로 시작된 ‘촛불추모제’는 학생들의 자유발언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교육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잘못하면 너네 점수 깎는다, 말 잘 안 들으면 옆 반에서 가르쳐 준 거 이 반에서는 안 가르쳐 준다, 이런 말 안 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자신을 재수생이라고 밝힌 한 남학생의 외침에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동의하는 학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성적을 빌미로 학생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우리 교육현장의 씁쓸한 단면이다.

전라남도 영광에서 올라왔다는 한 남학생은 “한국의 학생들이 OECD국가 중 수학능력은 최고라는 기사를 봤는데, 협동능력은 최저라고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며 경쟁을 강요하는 교육제도를 비판했다. 이어서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급식을 주지 않고, 수업 중에 바리깡을 들고 친구들 앞에서 머리를 잘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야 한다”며 학생의 자율권과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학교를 비판했다.

“이런 일 할 수 있단 걸 잊고 살았어요”

이 날 추모제에서 교육부의 징계 발언을 의식한 듯 학생들은 취재진들에 의해 얼굴이 노출될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일부에선 사진 기자들과 학생들 사이에 얼굴 촬영을 놓고 작은 실랑이들이 벌어지기도 해, 교육부의 처벌 위협에 대한 학생들의 위협감이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추모제에서 만난 학생들은 교육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경기도에서 왔다는 한 여학생은 “우리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그 동안 교육부에 대해서 불신이 있어서, 화가 난다던가 그렇지도 않아요”라며, “생각보다 애들이 많이 안 모여서 아쉬워요. 그 동안 교육부가 보여준 태도를 봐 와서 의견이 반영될 지에 대해선 회의적이긴 해요. 어떤 사건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이 점점 사그라들게 되긴 하지만, 어른들이 최소한 우리가 이렇게 힘들구나,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아주게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의견을 밝혔다.

추모제는 이후 문화공연과 자살한 학생에 대한 헌화 및 분향 등을 거쳐 8시 반 경 질서 정연하게 해산했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인원이 많이 모이지 않았던 것에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자신들이 직접 목소리를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에 대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서울 지역의 한 학생은 “희망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살았어요. 권리를 다시 찾은 기분이에요”라는 말로 집회를 마친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학생은 “교육제도를 당장 바꾸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 우리의 의견을 들어보려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라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라며,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을 호소했다.

촛불추모제에 참석한 학생들은 교육부에 보내는 요구를 적어 종이 상자에 담았다. 이 날 행사를 주최한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은 다양한 학생들의 요구가 담긴 상자를 교육부에 전달하고, 한 달 뒤 책임 있는 답변을 줄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촛불추모제에 많은 인원이 몰려 내신등급제에 대한 성토장이 될 것을 우려했던 교육부는 일단 한숨 돌린 모습이다. 그러나 다음 주 토요일인 14일 4시 광화문에서 두발자유화를 위한 집회가 예정되어 있어, 교육제도와 교육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교육부의 책임있는 태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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