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어느 날 그녀를 만나러 대학로로 간다.”
인터뷰 기사를 써야 한다는 내 이야기에 남편이 조언(?)해 준 기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비 오는 어느 날’ 만나기에는 ‘나’와 ‘그녀’가 너무 바빠, 장마철이 끝나 더위가 땀을 비 오듯 내리게 하는 어느 날이 되어서야 그녀를 만나러 대학로로 갔다. 비 속에서든 더위 속이든 우리의 약속 장소가 대학로이어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5년간의 약속 장소는 모교 근처에서 자연스럽게 대학로로 옮겨왔다. 한은정. 그녀가 그 곳에 있음으로…. 고등학교 연극부에서 시작된 인연은 ‘무대’라는 꿈을 공유하며 지금까지도 질기다. 학교를 졸업하며 연기를, 연출을, 극본을 전공하겠다며 꿈을 구체화시켜나가던 우리들 중 세 명이 살아 남아 한 친구는 스타일리스트를, 한 친구는 연기를, 은정이는 연극 기획을 하고 있다. 그들과의 꿈을 배신(?)하여 다른 전공을 택한 나는, 운동가로 살고 있는 옛 동지를 만날 때의 송구스러움으로 ‘가난한 연극인 내친구들’을 만난다. 동양정서 담은 작품 만들고파 내가 좋아하는 커피 집에 늦은 걸음을 해준 은정이는 오자마자 나가자고 한다. 5시. 오랜만의 낮술이다. “휴~ 진짜 덥네~~ 인터뷰부터 해결하자.” “그냥 ‘진짜 못해먹겠다’고 써줘!” “왜??” “나 요번에 코디네이션했던 공연 있잖아.” “잠깐! 그래도 인터뷰인데 네가 어쩌다 공연기획 일을 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해야지.” “너랑 나랑 앉아서 무슨 인터뷰는.” “대답이나 잘해~ 너 유학간 거부터 시작하자. 어쩌다, 왜 중국이었냐?” “대학 졸업 후 대학로에서 쭈욱 작업을 하다가, 발전적이지 못한 정체된 모습에 많이 고민도 하고. 스스로 느끼기에 부족한 부분이 자꾸 생기더라구.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무엇보다도 절실했고. 한 중 일 아시아를 묶어 동양적인 정서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 영국, 미국 놈들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고픈 야망(?)을 품고. 큭큭. 중국으로 무작정 떠났지.” 그녀는 “니하오와 시에시에” 단 두 마디 떨렁 믿고 중국 땅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땐 말 그대로 답답~ 어찌어찌 어학을 2년하고 대학원까지 시험을 봤는데, 여러 사정상 일단 보류를 해 놓고 한국 들어온 지 벌써 일년이 훌쩍 넘었다야. 언제든 다시 가서 공부를 마치긴 해야 하는데. 서른이 넘어가니 경제적 사정도 그렇고. 여러 가지 부딪히는 문제들도 만만치가 않네.” 여기서, 잠깐. “야~ 나이 얘긴 빼고 하자~~” “푸훗. 중국에서 공부할 때도 한국에서 했던 가락이 있으니까 중국으로 공연하러 오는 팀들의 통역이나 현지 스텝으로 일을 많이 했는데. 한국 돌아오고 나서도 본업인 기획일보다 중국 공연 팀 코디네이터, 통역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어. 바로 얼마 전에 끝난 공연도 그렇고…” 그래, 그 공연 얘기. “공연이 어쨌는데 그래?” “어휴~ 일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예술가들을 너무 우습게 알아요!” 이렇게 은정의 하소연은 시작됐다. “이 나라는 예술가들을 우습게 알아요!” “바로 저번 주에 끝난 공연, 공연 명이나 실명을 거론해도 되나? 하도 세상이 무서워서. 경기도립무용단의 <꿈, 꿈이었으니>라는 무용극을 했는데, 작년에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공연했던 걸 다시 국립극장에서 올렸어. 한 시간 반짜리 무용극에 중국 안무선생님이 몇 꼭지를 공동안무로 참여하셨고, 중국 무용수들 9명이 참여를 했지. 나는 연출가 김효경 선생님 제자라서 작년 공연부터 올해 공연까지 중국 팀 구성부터 진행까지 선택의 여지 없이 참여하게 되었고.” 중국에서 온 안무가 마위에씨는 중국 내에선 국보급 안무가라고 했다. 연출 김효경 씨와 십년지기 친구인데, 이번 공연은 김효경 씨와 경기도립무용단 단장인 조흥동 씨의 주선 하에 국제교류 차원에서 진행됐다 한다. 은정은 중국, 일본 예술가들과 십 년, 십오 년씩 사비 털어 교분을 쌓아오면서 문화교류의 발판을 만들어 놓은 김효경 선생님을 존경한다 했다. “그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개런티 얼마, 안무비 얼마. 이런 거 전혀 따지지 않고 김효경 선생님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함께 공연에 참여하는 마위에 선생님도, 없는 제작비에 중국 팀들이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항상 신경 쓰며 챙겨주시는 조흥동 선생님도. 육십 평생을 한결같이 예술가로 살아오신 그 분들이 존경스럽고 멋있었어. 그리고 함께 공연에 참여한 중국 무용수들을 보면서, 그들과 내 세대에는 나라와 언어의 다름, 정서의 다름을 떠나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 “뭐~ 좋은 일 했구만…” “중간에 말도 안 되는 일만 생기지 않았다면!! 그랬지.” 아무래도 이번 공연 기획 일을 하면서 쌓인 게 무척 많았던가 보다. “항상 일을 하면서 느껴왔던 건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행정가들이 다 말아먹어요!! 쥐뿔 모르면서 책상머리에 앉아서 펜대 굴리며 이래라저래라!” 은정이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전에 모든 일을 중국 쪽 코디네이션 회사에 맡기고 진행하기로 협의가 되었고, 그래서 중국 팀들이 한국 와서 공연할 수 있었던 건데. 한국 쪽에서 투명성 운운하면서 중국 코디네이션 회사와 통역, 그리고 중국 팀 책임자인 마위에 씨를 배제한 채, 무용수들만 따로 불러 개런티 문제며 여러 가지를 얘기했더라는 것이다. “사전에 수속 비와 진행 비 포함해 코디네이션 비용을 얘기했음에도 외국공연 팀 올 때 내규상 수속비용은 자비부담이라 지급해 줄 수 없다는 거야. 그래 놓고도 비자 받기 위한 시간이 촉박한데 이게 안 된다, 저게 안 된다. 열흘을 끌다가 비자 받을 수 있는 서류들을 전달했어요. 아직까진 중국에서 비자 받는 게 한국처럼 쉽지는 않거든.”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다 해놓고 입국을 했더니 또 재단이사장이라는 사람 이하 행정 팀에서 처음부터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나온 것이다. “글쎄, 직원 중에 중국어 할 줄 아는 사람 데려다 중간에서 띄엄띄엄 통역하게 하고, 중국 무용수들 앞에 영어로 된 종이를 내밀면서 무조건 사인하라 하고, 마 선생님을 불러달라 해달라 했더니 노노~ 그러면서 막고. 그 상황에서 내가 비서한테 물어보고 노크하고 사장실에 들어가 중국 팀 통역이라고 얘기했더니. 참 내. 첨 보는 애가 사장실에 무단침입 해서 점거하고 있다고 끌어내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러더니 한 두세 시간 지난 후던가. 의무를 다하지 않고 어쩌고 하면서 종이쪼가리 하나를 주더라. 계약해지통보서. 어이없어서.” “뭐! 그럼 공연 못했어?” “아니~ 공연은 어찌어찌 했지.” 공연은 어찌어찌 했지만 중국 팀들은 “왜 무용수이자 안무가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인 조흥동 선생님보다 한 단체의 재단 이사장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한 행동과 언행을 하는지” 이해 못하겠고, 한국이란 나라가 예의도 없고, 예술가들을 무시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마위에 선생님이나 중국 무용수들이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초청해서 공연하러 왔는데 연습실 한 번 오지 않았거든. 그러면서 어느 나라에서 주인이 먼저 인사하러 가냐는 거 있지? 주인이라니, 세상에. 봉사하라고 앉혀놓은 자리에서 주인 행세 하며 민간교류마저 막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들이야? 얼마 전 같은 재단에서 외국연출가 불러다 홀딱 망하는 공연을 10억씩 들여가며 한 거 있지? 그런 사람들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상품을 볼 줄 아는 눈이 있겠냐고.” 어휴~ 얘기 듣다 보니 또 덥다. “이번 일 겪으면서 왜 화병이 생기는지 알았다니까.” “이게 마약과 같다니까!” “그래, 넌 앞으로도 계속 이 일 할거야?” “생각 좀 해봐야지. 그 동안 쓴 국제 전화비만 해도 수월찮은데. 곰곰 생각하면 내가 미쳤지 싶다. 내 일 못해가면서 내 돈 써가면서, 기껏 욕이나 먹고. 이번 일은 좀 유별나게 문제가 있었지만 작품 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 ‘이 바닥 뜨고 말지. 내가 다시는 공연을 하나 봐라!’ 그러면서도 매번 공연 끝나면 다음 공연 찾아 헤매는 거 봐라. 지금도 내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올릴 뮤지컬 준비에 정신 없어요. 이게이게 마약과 같다니까!!!” 실연의 상처를 입은 또 다른 연극인 친구의 텔레파시성 등장으로 인해 은정과의 인터뷰는 여기서 끝이 났다. 마지막 즈음, “원래는 연극기획 일 얘기 좀 하다가, 내 업인 결혼이나, 이팔청춘이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로 마무리 할 생각이었다”는 나의 이야기에 은정은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이번 일도 내가 여자였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었던 거야. 더더구나 30대 초반의, 이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혹은 자리잡지 못한 여성이니까. 내가 남자였다면, 자신의 자리가 명확한 남자였다면, 이렇게 중간에서 막 대접은 받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여기서, 새삼 우리의 사회적, 생물학적 정체성을 곱씹어 봄은 오버인가?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시를 읽으며 울던 ‘삼순이’처럼 가난한 연극인 내 친구들을 떠올리니 마음 아리다. 한은정. 그녀는 사랑하며,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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