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걔가 알아버린 것 같아”

세상이 새로 배워야 하는 것

제나링크 | 기사입력 2005/08/01 [20:07]

[기고] “걔가 알아버린 것 같아”

세상이 새로 배워야 하는 것

제나링크 | 입력 : 2005/08/01 [20:07]
“원래 네 나이 때는 이성이나 성적 때문에 고민이 많아, 둘 중에 뭐지?”

요즘 이런 저런 생각으로 퍽 웃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담임선생님은 무턱대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조금 더 마음이 우울해졌다. 적어도 이 질문을 받기 전보다.

수많은 학생과 상담을 해보셨을 선생님도 나에겐 제대로 된 질문조차 던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질문에 대답했다.

“고민이 없는데요.”

선생님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보이시더니 날 교실로 보내셨다. 하지만 정작 실망한 건 나였다. 이성이나, 시험성적에 관해선 아무 고민이 없었다. 단지 문제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다른 친구들이라면 이미 타고났다고 생각하고 고민조차 하지 않겠지만, 난 수없이 생각해 봐야 할 내 안의 정체성.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하고 틈만 나면 같이 문자를 보내던 학교선배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그 선배는 내게 특별했다. 중학생이 되고 남자친구들에게나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을 나는 모조리 그 선배에게 느꼈기 때문이다. 한 학기가 끝날 쯤 우린 오래된 친구 사이보다도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전화를 해도 매번 받지 않거나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의아해하며 몇 일간 연락을 기다리던 중에, 선배의 친구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걔가 알아버린 것 같아.”

그 말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너무 놀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머릿속을 꽉 채웠다. 수많은 방법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지만, 결국은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한편으론 내 비밀이 그렇게 친했던 사이를 멀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실망스러운 건가 하고 많이 우울해졌다.

한동안 나는 진정이 되지 않아 정신 없이 보냈다. 하지만 곧 전화 한 통으로 침착함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일에 익숙한 내 친구의 전화였다. 그 친구와의 대화는 항상 유익했다. 학생인 내가 보기에 정말 많은 글자들이 적혀있는 교과서나, 게시 글 하나면 해답이 줄줄 이어지는 인터넷 지식검색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난 지금 내 친구에게서 배우고 있다. 내 딴엔 꽤 오래 학교에서나 집에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만 누가 이런 상황에 대처해야 할 방법을 내게 가르쳐 준 적이 있었던가? 혹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언급이나 했던가?

얼마 전 퀴어문화축체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그 밑에 달린 수많은 악성 리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이 난무하고, 이해 못하겠다는 둥 기사 속 주인공들을 비하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보는 내내 나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지네 딴엔 사랑이라고.”

정말 화가 났다. 그럼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난 ‘성소수자’였다. 아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만약 그들이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니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고 정확히 알아만 준다면 기사 속 주인공들의 감정을 존중해주지 않을까?

언제쯤 다시 그 선배에게서 연락이 올 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계속 연락을 기다려왔고 또 한편으로 날 이해해주지 못하는 선배에게 원망을 쏟아내고도 싶지만, 이젠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한다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새롭게 배우고 있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 선배도 이 사회도 새로 배울 수 있다고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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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두 2005/08/04 [23:24] 수정 | 삭제
  • 이반 학생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선생님이 어딨겠어요. 전국을 다 뒤져야 한두 분 계시겠죠. 그래서 이반학생들이 학교생활하기 더 어렵죠. 무사히 졸업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게 3년 학창시절이었다고 하면 과장인가요.
  • blast 2005/08/04 [00:13] 수정 | 삭제
  • 장난 아니죠. 그런 거 다 신경쓰다간 돌아버릴 지도 모르겠어요.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이 포비아면 참 난감하고 슬프죠.
    친밀함이란 게 한 쪽만 일방적인 건 아니었을텐데도.. 포비아 때문에 유독 문제되는 거잖아요.

    이해해주기를 계속 기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해해줄까요. ..

    그러는 새 멀어지는 관계도 많이 겪었습니다.
    마음 열어두는 사람도 없지는 않으니까 님에게도 그런 사람이길 바랍니다.
  • 헬렌 2005/08/03 [10:14] 수정 | 삭제
  • 셋 중에 뭐지..
    넷 중에 뭐지...
    암만 개수가 늘어도
    나의 고민은 그 안에없다는 거..
    그 기분저도 알아요.
  • yeoja 2005/08/02 [21:26] 수정 | 삭제
  •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가 동성을 좋아하는 애란 걸 알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똑같이 동성을 좋아하는 경우라면 기분이 좋을테고 아니라면 기분 나쁠 것 같아요. 나는 우정이었는데 상대는 연정이었다고 생각하면 서로 과녁을 잘못 맞춘 기분이겠죠, 자기의 기분을 상대에게 표시할 때는 누구라도 목적이 있습니다 비록 우정이라도 우정에 대한 목적과 연정에 대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상실감이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동성애자는 자기가 동성애자인 것을 세상에 밝히면 활동범위가 극도로 좁아지는 것을 두려워 해서 밝힐 수 없을 것 같아요 밝히지 않으면 동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성을 좋아할 수도 있어서 선택의 범위가 다양한데, 자기가 동성을 좋아하는 애란 걸 사람들이 알아버리면, 사람들의 틀안에 굳어져버린 선입견이 동성애자들의 활동범위를 극도로 좁아지게 해 동성만 좋아하는 것처럼 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 선배라는 분도 만약 계속 주인공분과 사귀게 되면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러면 이성과 사귀기가 어려워지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될까봐 연락을 끊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은 직접 때리는 것보다도 무지 아플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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