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만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에게 ‘평등한’ 장르처럼 보였다. 일단 시작할 때 큰 돈이 필요하지 않다. 종이와 펜과 연필과 지우개만 있으면 누구라도 시작할 수 있다. 돈을 들여 정규교육을 받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 만화가가 되는 데에 있어서 장애로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독자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확실한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정만화가의 원고료와 소년만화가의 원고료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의아함을 넘어선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보통 잡지 연재를 하는 만화가들의 원고료는 인지도와 경력에 따라 다르게 책정된다. 그런데 여기에 성별 기준이 하나 더 첨가된다. 일반적으로 신인작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여성만화가는 페이지 당 2만5천원, 남성작가는 3만5천원 정도를 받는다. 소위 ‘순정’ 작가들은 ‘소년만화’ 혹은 ‘극화’를 그리는 작가들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수준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잡지 연재를 하지 않는 단행본 작가들의 경우도 이를 기준으로 잡아 지급하게 되는데 보통 순정 신인 작가는 약 250여 만원, 소년만화의 경우는 350여 만원이 단행본 한 권의 원고료로 지급된다. 몇 년 전 어떤 작가에게 이에 대해 물었을 때 “소년만화 시장이 순정보다 더 커서”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최근 소년만화 시장 다 죽었다는 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처럼 성별 고료 차이는 굳건하다. 한 남성작가는 “소년작가는 순정보다 배경도 정교하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어시스트들을 많이 써야 한다”는 말로 고료 차이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한 순정작가는 “우리는 어시스트를 쓰고 싶어도 줄 돈이 없어서 못 쓴다”는 냉소를 보이기도 했다. 모든 소년만화들이 ‘화려한 자선에 끝내주는 배경’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만화가 원수연은 2003년 아웃사이더 11호에 기고한 글 <만화 고통의 혼절... 그리고 혼절의 쾌락>에서 고료 차이에 대한 출판사의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출판사의 이론을 빌리자면 남자 만화가들의 작품은 책이 나오고 일주일이면 팔릴 만큼 다 팔린다는 것이고, 여자 만화가들의 작품은 두고두고 야금야금 천천히 나가기 때문에 부수가 남자보다 많이 나가도 자금회수 부분이 더디기 때문이다. 만화 계를 주도하는 파격적인 부수는 남자만화에서 더 나온다는 것도 주된 이유이다.” 원 작가는 출판사의 경제 논리에 대한 반박의견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남녀 구분말고 아예 팔리는 대로 고료를 정하든가. (중략) 사업을 하면서 단지 자금회수의 시간 때문에 그런 논리가 나온다면 사업에 투자라는 개념은 뭐한 말인가? 거기엔 인간적인 평가기준도 한 몫을 한다. 남자는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인 처녀 순정작가들은 또 뭐란 말인가. 이 곳은 철저한 능력의 시장이 아니었던가. ” 이쯤 되면 여성/남성작가의 고료 차이에 모종의 성적 편견이 개입되었다는 의심이 짙어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고료 차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화를 하는 지인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작가들 자신도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밀리는 건 당연하고 가끔 떼 먹히는 일도 있을 정도로 ‘정해진 고료라도 제때에 받으면 감지덕지인’ 현실에서 그 ‘정해진 고료’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항의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까닭이 클 것이다. 최근에는 출판만화 시장이 악화되었다는 명목 하에 순정 고료의 경우 150만원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순정작가의 경우 한 작품을 하는데 보통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250만원의 고료를 받아도 재료비, 어시스트 수고비 등을 제하고 나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이다. 그래도 돈보다는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보고 신인작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암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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