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성폭력 ‘선정적’ 보도 심각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6개 일간지 모니터링

박희정 | 기사입력 2006/01/23 [22:46]

청소년성폭력 ‘선정적’ 보도 심각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6개 일간지 모니터링

박희정 | 입력 : 2006/01/23 [22:46]
“싸인펜으로 허벅지 찌르기, 불에 달군 숟가락으로 복부 지지기, 필기구로 성기와 항문 후비기... 광기어린 가학행위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인천시내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들이었다. (중략) 이들은 일회용 라이터로 달군 숟가락으로 K양의 왼쪽 배를 지졌다. 다음에는 사이펜으로 허벅지와 인중을 찌르기 시작했다. K양은 고통으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더 맞을까봐 비명을 삼켜야 했다. 이들은 K양을 벌거숭이로 만들더니 필기구와 나무젓가락으로 치부를 쑤셔대고 디지털카메라로 사진까지 찍었다.”

삼류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다. 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5년 4월 22일자 기사 중 일부다. 자극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미디어의 선정적인 성폭력 보도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은밀한 곳’, ‘노리개’ 등 문제적 표현 많아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이하 상담소)는 작년 1월~8월까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등 일간지 6곳을 중심으로 ‘청소년 성폭력 사건’ 보도내용을 집중 모니터하고 그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주요 미디어에서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의도에서다.


특히 “성폭력 사건이 보도되는 과정에서 기자나 편집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여과되지 않고 기사화되었을 때,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오해들이 사회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며 이번 기사분석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했다.

상담소 측은 사건 보도횟수와 기사의 분량에 대한 통계와 함께 제목이 적절한지, 전체 보도내용은 어떤지, 삽화는 어떤 것이 들어갔는지,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는지, 기사의 비중이나 담당기자가 있는가 여부 등을 기준으로 기사의 질적 측면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먼저, 잘못된 용어 사용 문제가 여럿 지적됐다. 성기를 “은밀한 곳”, “치부” 등으로 표현하거나 “성고문”, “성학대”, “성노리개”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건의 심각성을 떨어뜨리고 성폭력 피해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주입한다는 지적이다. “10대 소녀”, “여중생”, “여고생” 등의 용어로 피해자의 연령과 성별을 강조하는 것도, 가해자의 성별과 연령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피해자를 바라보는 선정적 시선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 고려하지 않는 언론

-아빠는 합의 해줬지만... “난 절대 용서못해”
성폭행 피해 여중생 법원에 직접 고소장 (조선일보 2005년 3월 4일자)
-당찬 여중생, 부친이 성폭행 가해와 합의
“내뜻 아니었다”직접 고소 구속 (경향신문 2005년 3월 4일자)

이러한 표현들은 성폭력 피해에 대한 ‘합의의 권리’가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있다는 통념을 깔고 있다. 같은 날 서울신문 기사의 표제어가 “성폭행 피해자.부모 각각에 고소권, 아버지가 몰래합의 가해자 풀려나자 미성년 딸 ‘합의무효’...다시 구속”이라고 한 것에 비교하면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기사 서술의 문제도 중요하게 제기됐다. “필기도구 등으로 C양의 신체 은밀한 곳을 찌르는”(동아일보 2005년 4월 22일자)과 같이 가해행위를 자극적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표현들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면서, 피해자에게 재차 가해를 입히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미디어의 선정적 시선은 기사뿐 아니라 삽화의 삽입과 배치 등에서도 드러난다. 굳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필요하지도 않은데 피해자의 뒷모습을 싣거나 사건을 재연하는 삽화를 배치하는 것은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또한 가해자를 까맣게 칠해 ‘악마’처럼 묘사하는 삽화는 실제로 대다수 성폭력 가해자가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외모에서부터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왜곡된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 차’ 고스란히 반영돼

‘진실은 알 수 없다’ 식으로 성폭력 규정을 회피하는 것이나,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 서술방식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특히 그간 성폭력 사건 보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되어 온 부분이다.

-정모(56)단장은 “부적절한 총대장을 선임한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식나나 잠자리 등은 부족한 예산을 고려해볼 때 그 어느 국토순례단보다 나았다”고 말했다. 총대장직에서 물러난 황모(43)씨는 성희롱 의혹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총대장직을 맡았는데 억울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5년 8월 2일자)

-권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A선수 팬클럽 활동을 해왔으며 지난해 12월 "2003년 7월 승용차 뒤쪽 좌석에서 A선수에게 강간을 당했다"며 A선수를 성폭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A선수는 "서로 합의 하에 벌어진 일"이라며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중앙일보 2005년 7월 27일자)

상담소 측은 이러한 기사들이 ‘억울하다’, ‘합의 하에 벌어진 일이다’와 같은 가해자의 말로 끝맺고 있어 마치 “본질 자체가 성폭력이 아닐 수도 있다”거나, “가해자의 입장에 보다 무게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반면 중앙일보와 같은 사건을 다룬 아래 서울신문 기사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피해자 측 변호사의 요구사항과 문제제기로 결론지음으로써 성폭력 피해에 대한 현장검증이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는 분석이다.

-유명 프로농구 선수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고소사건 조사과정에서 검찰이 피해자와 피의자를 모두 불러 각종 상황을 재연토록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성폭행 사건에서 고소인을 현장검증에 참여시키거나 피의자와 대질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정신적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좀체 실시되지 않는다. (중략) B양의 법률지원을 맡고 있는 강지원(전 청소년보호위원장) 변호사는 “현장검증을 실시하고 성폭행이나 성행위 장면을 일일이 직접 재연토록 한 것은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하는 검사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서 수사검사 교체 및 문책을 요구했다. (서울신문 2005년 7월 27일자)

이외에도 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언론보도들은 사건을 사소화하거나 희화화하고, 일탈 청소년들의 문제로 한정하는 등 여러 문제들이 지적됐다. 상담소 측은 “청소년 성폭력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점”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더라도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과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들어진 기사와 독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기사는 전혀 다른 사회적인 효과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또 “성폭력의 심각성이나 이와 관련된 제반 사회적 여건의 문제점 등에 대하여 신문사의 관계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며,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 또는 성폭력상담소 등 관련 기관과의 간담회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것”을 제안했다. 상담소는 모니터링 분석결과를 토대로 오는 25일 오후 2시부터 서울여성플라자 NGO실에서 발표 및 토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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