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학생과 교사는 왜 대화하지 않을까

탈학교한 학생의 눈에 비친 교실

김초롱 | 기사입력 2006/02/06 [19:39]

[기고] 학생과 교사는 왜 대화하지 않을까

탈학교한 학생의 눈에 비친 교실

김초롱 | 입력 : 2006/02/06 [19:39]
학급은 학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학급 내에서의 수업은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과 학생 간의 소통으로 진행되어야 하므로 이들 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교사는 학생에게 교과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은 그를 듣고 필기를 한다. 졸거나 ‘잡담’을 하는 학생이 있으면 교사는 그 학생에게 경고를 주어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고, 수행평가 점수에서 감점하기도 한다.

교사는 오로지 ‘정답’만을 말해야 한다. 만에 하나 ‘오답’을 말한다면?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조롱 받는 신세가 되고, 오답을 배운 학생은 시험문제를 틀리게 될 것이다. 또한 교사는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학생에게 있어 교사의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다. 학생은 교사에게 절대복종 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러한 구조에서 학생들은 자기표현을 억제하게 된다. 교사는 항상 정답만을 말하므로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드물게 발생하는 질문들도 단지 부연설명을 요구하는 것일 뿐, 교사가 말한 내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또한 학생 간의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업에선 오로지 교사를 바라보며 온 신경을 교사가 말하는 내용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잡담’은 용납되지 않는다. 소리가 들리면 교사는 “지방방송 꺼라” 라고 말한다. 정답은 항상 교단에서 곧바로 주어지기 때문에 학생들 간의 이견이란 존재할 수 없고, 의견 공유가 일어날 수도 없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이면 마치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침묵해야 한다.

교사에게서 ‘A는 B이다’라고 배운 학생은 그것을 신념으로까지 여기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아니야, A는 C야’, ‘A는 B이기도 하고 C이기도 하고 D이기도 해’라고 말한다면 학생은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니까. 교사는 ‘절대적 진리’인 마냥 정답을 제시하고 가히 세뇌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을 학습시킨다. 일찌감치 생각의 기로를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암기된 정답들이 아무리 개인의 머리 속에 가득 들어차 있더라도 고지식한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그 정답들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일 뿐이라, 진정으로 자신이 그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은 ‘터득한 것’이 아닌 단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떠한 사람들은 “사교육으로부터 공교육으로의 회귀”를 제창하지만 공교육이나 사교육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생에게 학구열이 발산되기란 힘들다. 학구열은 어떠한 학문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사실들을 습득해 나갈 때 발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탐구과정 자체를 생략해버림으로써 학구열을 말소시켜버린다. ‘아니다, 나는 학교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고? 다시 한 번 자문해 보기 바란다. 그 열기가 정말 학구열인지, 시험에서 고 득점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학생과 교사는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알고 있고 거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함께 의견을 나누지 않을까? 힘을 합치지 않을까? 학생과 교사가 함께 호흡하면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학생과 교사 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하다. 학급에서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비인격적이어서,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 학급 안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하면서도 서로에게 배타적이라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기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간 이러한 수직적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교사의 역할에 대해 재고해보아야 한다. 교사는 ‘미성숙한’ 학생을 훈육하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조언자’ 정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교사는 발제를 통해 어느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여 학생들의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직접 사고하는 것은 학생이어야 한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더불어 고민하며 모색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사는 자신이 ‘모범’이 아닌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학생과 교사가 수평적인 관계를 가진다면, 지금의 비인격적 관계의 벽을 뚫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인격적 관계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학생과 교사가 한 자리에 앉아 동등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학생과 교사가 함께 자신이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에 대해 털어놓고, 대책을 고심하고, 고쳐나가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yeoja 2006/02/09 [00:23] 수정 | 삭제
  •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학교 선생님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죠, 그래야 학생들이 선생님 말씀을 따르고 일사분란하게 학습에 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여선생님이 초등학교에 많은 이유도 그런 이유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휘어잡지 못하면 수업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생각요

    수업을 학교에서 주는대로 각자 알아서 능력껏 받아 머리속에 넣고 능력없으면 듣는 시늉만이라도 하고 있으라고..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는 경쟁에서 1등하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배우는 차체를 위해서 오는 아이들도 있을 것인데, 선생님들은 일방적으로 수업하며, 경쟁에서 승리한 학생들은 따라오고 따라올 능력없으면 그냥 왔다갔다만이라도 하라는 교육방식은 많은 학생들을 따분하게 만들고 재미없고 행복하지 못한 괴로운 학교생활로 만들기 쉽습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학생들만을 위한 학교이고 뒤쳐지는 학생은 필요없다는 듯이 경멸하듯이 비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학교가 인재를 양성한다고 하지만 모든 학생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배우서 사회생활에 적응 할 수 있게 해야하는데 일부의 엘리트 학생만을 위해 뒤쳐지는 학생은 필요없다는 듯이 학교생활을 불편하고 괴롭게 만들며 가르치는 방식은 개선됐으면 좋겠습니다
  • windy 2006/02/08 [15:56] 수정 | 삭제
  • 초등학교 때 하던 받아쓰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한다.
  • 지희 2006/02/06 [23:50] 수정 | 삭제
  • 선생들은 학생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죠
    사람으로 보지도 않아요
    오로지 사회적응력(=순응력)이 필요한 학생이라고밖에 보지 않는 것 같아요
    학교 선생 중에는 정말 배울 것이 많은 '친구'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죠
    어지간히 내가 늙고 선생이 젊지 않는 한..
  • 지은 2006/02/06 [23:13] 수정 | 삭제
  • 마자요.
    학교모습이 그래요.
    학생들은 외로운 섬이 되어버리는 곳이 교실이에요.
    특히 수업시간이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