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은 학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학급 내에서의 수업은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과 학생 간의 소통으로 진행되어야 하므로 이들 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교사는 학생에게 교과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은 그를 듣고 필기를 한다. 졸거나 ‘잡담’을 하는 학생이 있으면 교사는 그 학생에게 경고를 주어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고, 수행평가 점수에서 감점하기도 한다.
![]() 이러한 구조에서 학생들은 자기표현을 억제하게 된다. 교사는 항상 정답만을 말하므로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드물게 발생하는 질문들도 단지 부연설명을 요구하는 것일 뿐, 교사가 말한 내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또한 학생 간의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업에선 오로지 교사를 바라보며 온 신경을 교사가 말하는 내용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잡담’은 용납되지 않는다. 소리가 들리면 교사는 “지방방송 꺼라” 라고 말한다. 정답은 항상 교단에서 곧바로 주어지기 때문에 학생들 간의 이견이란 존재할 수 없고, 의견 공유가 일어날 수도 없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이면 마치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침묵해야 한다. 교사에게서 ‘A는 B이다’라고 배운 학생은 그것을 신념으로까지 여기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아니야, A는 C야’, ‘A는 B이기도 하고 C이기도 하고 D이기도 해’라고 말한다면 학생은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니까. 교사는 ‘절대적 진리’인 마냥 정답을 제시하고 가히 세뇌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을 학습시킨다. 일찌감치 생각의 기로를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암기된 정답들이 아무리 개인의 머리 속에 가득 들어차 있더라도 고지식한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그 정답들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일 뿐이라, 진정으로 자신이 그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은 ‘터득한 것’이 아닌 단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떠한 사람들은 “사교육으로부터 공교육으로의 회귀”를 제창하지만 공교육이나 사교육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학생과 교사는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알고 있고 거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함께 의견을 나누지 않을까? 힘을 합치지 않을까? 학생과 교사가 함께 호흡하면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학생과 교사 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하다. 학급에서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비인격적이어서,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 학급 안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하면서도 서로에게 배타적이라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기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간 이러한 수직적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교사의 역할에 대해 재고해보아야 한다. 교사는 ‘미성숙한’ 학생을 훈육하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조언자’ 정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교사는 발제를 통해 어느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여 학생들의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직접 사고하는 것은 학생이어야 한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더불어 고민하며 모색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사는 자신이 ‘모범’이 아닌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학생과 교사가 수평적인 관계를 가진다면, 지금의 비인격적 관계의 벽을 뚫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인격적 관계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학생과 교사가 한 자리에 앉아 동등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학생과 교사가 함께 자신이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에 대해 털어놓고, 대책을 고심하고, 고쳐나가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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