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으로의 여행

연극을 하는 사람 이지연

정희원 | 기사입력 2006/03/06 [18:59]

다른 삶으로의 여행

연극을 하는 사람 이지연

정희원 | 입력 : 2006/03/06 [18:59]
알라딘 램프가 있다. 거인이 나타나 당신에게 “1년 동안” 다른 사람이 되어 당신이 경험할 수 없는 경계 너머 다른 삶으로 여행할 수 있다거나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인물, 어떤 삶을 택할까? 다채로운 욕망의 항목들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환상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고 “그럼, 이렇게 해주길!” 하고 요청하지 않을는지.

알라딘 램프에게 소원을 비는 그를 만났다. ‘요술램프를 쥔 지니의 눈이 휘둥그래 질 것’이란 느낌이 와 닿았으니. 기다렸다는 듯 그가 1년이란 시간을 몽땅 쏟아 붓기로 선택한 인물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자살하는 왕따 여고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매매 현장의 한 여성’이었다.

‘천의 얼굴’을 갖고 싶다

그는 ‘연극하는 이지연’(27)이다. 생명공학을 공부하다 잠시 ‘외도’했던 연극에 푹 빠져버린 사람. 과업으로 다가오는 학과와 정신을 앗아버린 연극 사이에서 고민하다, 긴 망설임 끝에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택했다. 그리고 웬만해선 뒤돌아보지 않는다. 연극인이 된 후 벌써 열 작품 이상 무대에 섰다. 일관되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배우 자신에게 원래 있는 것들로 안주하거나 고정적인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니콜 키드먼 같은 ‘천의 얼굴을 가진’ 등의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가 되고 싶은 것.

처음에는 ‘연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가 거쳐갔던 인물들은 독특한 무게를 지녔던 것도 사실이다. 학내 연극 동아리에서 맡았던 故윤금이 역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우리 사회의 치부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처를 연극이라는 예술로 담아낼 때, ‘살얼음판 같은 조심스런 재현’의 어려움과 동시에 ‘꼭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차츰 생각하게 되었으니.

그 후 극단 죽죽(竹竹)에 합류했고 작년에는 “내 인생의 연극” 목록을 구성할 만한 <나의 교실>과 <지상의 모든 밤들>을 만났다. <나의 교실>의 왕따 청소년, <지상…>의 성매매 여성 두 역할을 반복했던 1년, 급기야 주위에선 “네가 밝은 역할, 즐거운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염려를 터뜨릴 정도로 최대한 ‘왕따의 자살’과 ‘피해여성’에 집요하게 천착하면서 보냈다. 그에겐 “알라딘 램프” 속 시간들이었다.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보다도 더 흥미로운 것은 “관객의 반응”이었다. “극은 허구지만 연극이 막을 내리는 곳, 객석은 현실이다.” 지연은 그렇게 말한다. 교실 속 “집단 따돌림”의 가해, 피해, 방관자들,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역학관계를 그려내 십대 층을 중심으로 알려졌던 학원 프리스타일극 <나의 교실>에서 자살하는 현경을 반복적으로 연기하던 지난 한 해는 배우로서의 고민도 깊어지던 시기였다.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짓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고.

객석의 소소한 변화들

그가 <나의 교실>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을 때였다. 맨 앞자리에 고등학교 여학생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무시무시한 자태로 껌을 씹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자꾸 신경이 쓰인 나머지 하마터면 무대 위에서 ‘좀 똑바로 앉으면 안 되겠니’ 같은 대사가 나올 뻔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주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그 여학생이 혼자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통곡하듯 엉엉 울음을 터뜨렸는데, 지연은 “나에겐 너무 따뜻한 박수였다”고 회상한다.

“솔직히 배우라면, 자꾸 새로운 것에 출연하고 싶다.”

따라서 흥행의 신호이기에 반갑지만 개인적으로 쉽지 만은 않은 것이 바로 “앵콜 공연”이다. <나의 교실>의 ‘왕따 현경’은 중국 국제연극제까지 다녀왔으니 분신역할을 톡톡히 했을 터. 지연은 <나의 교실>이나 <지상의 모든 밤들>이 예상 외 많은 사람들을 두드렸고, 관객들이 다양한 의미 작용을 일으켜 놀랐다고 한다. 이 고집불통 연극에 관객이 보여준 관심은 정말 큰 것이어서 1년간 자신을 지나간 ‘객석, 소소한 변화’들에 관심이 자꾸 간단다.

“관객들과 뒤풀이로 고깃집에 갈 때가 있어요. <지상…>이 이브에 막을 내렸는데 뒤풀이에 수능이 끝난 고3 남학생들이 왔더군요. 가끔 성 구매자 노릇을 했다고 고백하면서 한 친구가 고개를 숙이고 일어서더니 ‘대학 입학하면 성매매 근절을 위한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말해서 삼겹살 집이 고요했던 적이 있죠. (웃음)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한 번 생각의 모양이 바뀌면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졸업을 하고서도 알게 모르게 삶에, 사회적 입장에 작용할 거잖아요. 그거는, 작지만 실질적인 거잖아요.”

“실은 나 자신은 그다지 연기 외적이거나 작품 외적인 의미나 동기를 강렬하게 갖고 있는 편도 아니었어요, 처음엔 ‘파격변신’을 할 수 있는 역할에 욕심이 나서 꼭 해야겠다, 이렇게 시작했으니까요. ‘그냥 거기 그러고 있네’ 정도로 받아들이던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나 자신의 의식, 모순을 보는 눈, 여성주의 관점이랄까 모두 연기를 하는 지난 1년 동안 형체를 갖추고 생겨났다고 봐야지요. 나는 그게 램프 거인의 선물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허구와 현실을 잇는 운명

“봄에는 왕따, 여름은 성매매 피해여성, 가을부터 다시 왕따”였다니. 추운 겨울 하얀 입김이 서리는 소극장에서 폭력들만 삼켜온 한 여성의 진흙빛 목소리를 허공에 울리던 그. 할 말이 너무 많을지 모르는, 말이 없어서 슬픈 춤만 출지도 모르는, 타자의 삶을 대신해서 나무로 만든 무대 위에서 날마다 퍼포먼스를 재생한 1년이 쉽지 않았으리란 것을 문득 느꼈다. 지연처럼 완전히 한 인물과의 동일시를 꿈꾸고, 철저한 극중 몰아를 원했던 배우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예정된 작품들 이후 다음으론 “장애여성” 역을 맡을 수 있길 원하고 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故이은주 못지않게 ‘배우들이 거부하는 배역’목록을 보유한 그의 발걸음을 조금 긴 시간 동안 필름을 돌리듯 함께 뒤돌아 봤다. 그는 애초에 경계를 설정한 적이 없으니 경계를 넘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주변인들을 위한…’과 같은 거룩함도 “푸하하” 터뜨리는 지연 특유의 웃음 한 방에 다 날아가 버린다. 무대는 마치 정치적 계산이나 도덕적 위선이 틈입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그는 무대 속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특히 어른이 되는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과 호흡하고 싶다고 한다. 무대는 필름처럼 한 번 찍으면 동시다발적으로 오픈하고, 스크린 스타처럼 시사회에서 언론을 대동한 채 ‘히로인’으로 우아하게 나타났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경로가 아니다. 어쩌면 일회적이며 반복적인 연극은 관객에게는 매번 신선함을 주지만 배우 입장에선 “노동”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추운 겨울 을씨년스럽고 부스럭거리는 소극장 문화에도 그는 한 치 어두움도 허용하지 않는 순도 백 프로 희망을 본다. 그 ‘희망’이란 다름 아닌 “허구와 현실을 잇는 부담스러운 운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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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라 2006/05/08 [06:14] 수정 | 삭제
  • 저도 장이처럼 얼굴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그때 제가 장이랑 같이 이 연극을 봤었거든요. 이 인터뷰에서 다시 뵈니 너무 반갑네요. 앞으로도 많은 무대에서 뵈었으면 좋겠어요. 연기라는 건 정말 매력적인 것 같아요. 완전히 내가 아닌 그 사람이 되는 것. 전 마임에 푹 빠져 있거든요. 그림으로의 표현도 너무 매력적이지만 연기라는 것도 표현방법에 있어서 그림만큼 어쩌면 그림 보다 더 빠져드는 것 같아요.
  • Dr.p 2006/03/09 [00:23] 수정 | 삭제
  • 가슴 아프고 처절한 역을 맡게되면 자기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홀로코스트 영화를 찍었을 때 자기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 얘기를 보고, 연기라는 것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부럽네요. 보다 일찍 자신의 길을 찾고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요.
  • 장이 2006/03/09 [00:17] 수정 | 삭제
  • 얼굴이 익숙하다.했는데, 와..작년에 본 연극 <지상의 모든 밤들>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신 분이시네요. 연극도 정말 좋았지만, 기사를 읽어보니까..지연님도 멋지세요.. 앞으로 어떤 연기를 보여주실지 기대되는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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