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재’로 가득한 아프간의 과거와 현재

아티크 라히미의 작품들

윤정은 | 기사입력 2006/03/14 [05:59]

‘흙과 재’로 가득한 아프간의 과거와 현재

아티크 라히미의 작품들

윤정은 | 입력 : 2006/03/14 [05:59]
아프간 망명작가 아티크 라히미의 첫 소설 <흙과 재>는 먼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것을 2001년 프랑스어로 번역해 출판되어 전세계적으로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1985년에 프랑스로 망명해 살고 있는 아티크 라히미의 소설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사브리나 누리는 “일반적으로 다리어라고 불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아프간에서 사용되어 온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작품인 <흙과 재>를 두고 “아프간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로 했던 카타르시스의 성격을 지닌 소설”이라고 표현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다룬 이 소설이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9.11테러 직전이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 이어지자 전세계는 앞을 다투어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 소설을 다시 번역했고 한국어로는 2002년에 출간됐다. 당시 작가는 또다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인 고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했지만, 아프간의 비극을 다룬 이 소설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라는 비극적 현실에 의해 전세계에 더욱 알려지게 됐다.

그때 당시 전세계 비평계는 전쟁과 비극을 이토록 시적이고 은유적인 언어로 수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흙과 재>는 ‘너’라는 화법을 통해 자기만의 독백의 세계에 갇혀버린 주인공 다스타기르와 독자를 연결시킨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고통으로 인해 침묵의 세계에 갇힌 아프간 사람 다스타기르와 독자들은 아프간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특유의 중얼거림과 은유의 언어로 소통하게 된다.

아티크 라히미의 두번째 소설인 <꿈과 공포의 미로>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할 당시인 197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탈레반 정권 하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처절한 서술에 의한 묘사가 아니라, 짧고 간결한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책은 아티크 라히미가 마치 1985년에 아프간을 떠날 당시 상황을 자전적으로 쓴 것만 같다. 대학생인 파라드는 파키스탄으로 도망가려는 친구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돌아오던 밤에 통행금지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의식을 잃는다. 그러나 독자가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 걸린다. 소설의 시작은 파라드가 의식을 잃고 난 다음인 암흑 속에 갇힌 의식, 무의식의 공포와 꿈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것인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갇힌 것인지 그 자신 또한 알지 못한 채 무의식의 독백으로 계속 이어진다. 누군가 옆에서 “형제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 또한 실제 소리인지, 진(jinn, 코란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존재들’, 천사보다 수준이 낮은 영적인 존재들)들의 포로가 된 것인지, 파라드는 오랫동안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한다.

파라드는 그동안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공포와 폭력적인 현실세계 사이에서 헤매다가, 가까스로 희미하게 자신을 비추고 있는 촛불을 통해 의식을 되찾는데, 그의 눈 앞에는 낯선 과부와 아이가 서있다. 탈레반 정권 하에 남편을 잃은 마나즈의 도움을 받아 파라드는 그의 어머니와 가까스로 접촉했으나,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군인들에 의해 파라드의 어머니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탄자를 팔아 넘겨 아들을 파키스탄으로 망명시키기로 작정한다.

한편 군인들을 피해 마나즈의 집에 숨어있는 파라드는, 신비스런 분위기의 마나즈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마나즈의 아들 ‘야야’에게 머물고 싶은 감정이 점점 커져, 도피를 망설인다. 그러나 마나즈는 얼굴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평온한 목소리로 파라드에게 “신발 신으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라드는 마나즈가 보는 아래서, 양탄자에 몸이 둘둘 말리고, 양탄자에 몸을 숨긴 채 국경을 넘는다. 아프간을 벗어난 파라드는 중얼거린다. “나는 일어난다. 다리가 움직인다. 달려야 해. 나는 달린다. 물 위로, 땅 위로.”

그러나 파라드가 아프간 국경에서 멀리 더 멀리 달아나는 동안, 독자들은 점점 더 아프간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된다. 아프간을 뒤로 하고, 15년 이상을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가 매일 같이 아프간으로 향하는 시선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파라드가 뒤로 한 아프간에는 아버지의 폭력을 오랫동안 참아오면서 살아가며 ‘괄호에 갇힌 미소’를 짓는 어머니가 있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양탄자마저 아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써버리고 공포와 절망에 갇힌 여성들의 현실이 있고, 남편과 가족을 폭력에 의해 잃어버리고도 고통을 표현할 수조차 할 수 없는 폭압의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는 마나즈가 군인들의 폭력에 의해 정신이 나간 남동생에게 얼굴을 가린 채 젖을 먹이며 고통의 시간을 숙명처럼 견디고 있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어 “물 위로, 땅 위로 달리는” 파라드보다,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괄호 속에 갇혀있는’ 아프간 여성들의 현실을 그린 장면으로 자꾸 시선을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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