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여성들이 대처하라?

‘피해자 조심’ 강조하는 ‘성폭력 대처’ 보도 유감

박희정 | 기사입력 2006/03/21 [00:17]

성폭력, 여성들이 대처하라?

‘피해자 조심’ 강조하는 ‘성폭력 대처’ 보도 유감

박희정 | 입력 : 2006/03/21 [00:17]
올해 초 연쇄 성폭력범 이모씨의 검거에 이어 최근 아동 성폭력 사건이 이슈화 되면서 성폭력 관련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사건 보도가 늘어난 것과 함께 소위 ‘성폭력 예방법’에 관련된 기사들도 종종 눈에 뜨인다. 이와 같은 성폭력 예방과 대처를 주제로 한 기사들은 호신용품이나 방범요령 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어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피해자에게 조심을 강조하거나 성범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강화할 수 있는 내용도 담고 있어 문제다.

호신술 호신용품 ‘쉽게 쓰는’ 기사들

중앙일보는 3월 10일자 <‘더듬더듬 손모가지’ 요렇게 비트세요> 제하의 기획기사를 통해 ‘껴안을 때 손가락 꺾기’, ‘앉아 있는데 뒤에서 껴안을 때 박치기’ 등 호신술 몇 가지를 소개했다. 기사는 “태권도, 유도, 검도, 합기도의 고수들”이 전하는 “알토란 같은 비전(秘傳)”이라며 “손쉽게 익힐 수 있는 ‘간단 호신술’”을 강조했다. “아빠나 동생에게 파트너가 돼 달라고 부탁”해서 “몇 번만 연습하면 당신도 ‘고수’”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TV오락프로그램에서도 가끔 소개되는 이런 호신술은 실질적으로 시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러한 동작들이 몸에 배어서 실제 위기 순간에서도 쓰일 수 있으려면 평소 많은 수련이 필요하며, 완력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 아무 훈련 없는 여성들이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더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 상황에서 여성들은 당황하거나 공포심을 느껴 얼어붙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면 가까이 할애한 기사지만 실질적으로 효용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몇 번만 연습하면 당신도 ‘고수’” 식의 호신술 강좌는 ‘길 가다 낯선 남자에게 당하는 성폭력’만을 전제로 하고 있고, 자칫 ‘여성들이 저항하면 가해자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을 심어줄 수도 있어서 위험하다.

국민일보는 3월 8일자 <“내 몸은 내가 지킨다”… 성폭력 예방 ‘호신용품’ 불티> 제하의 기사에서 호신용품 구매 붐을 소개했다. 사실상 호신용품, 호신술 기사는 성폭력 사건이 이슈화될 때마다 보도되고 있다.

신 방범 용품 '불티' (부산일보 2006년 2월 6일자)
‘발바리들 때문에’ 여성 호신용품 불티 (헤럴드 생생뉴스 2006년 2월 2일자)
여성들 “내 몸 내가 지킨다”… 호신술 강좌-관련용품 불티 (동아일보 2004년 9월 21일자)

그러나 이들 기사들은 호신용품 사용에 있어서의 주의점, 문제점에 대한 내용은 빠지고 단지 호신용품이 ‘잘 팔린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호신용품이나 호신술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등에 대한 고려는 찾기 힘들다. 관련 업계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단순히 기사를 위한 기사에 그치는, 습관적 보도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피해자가 조심하면 ‘성폭력 예방’?

연쇄 성폭력범 이 모씨가 검거된 후 2월 5일자 오마이뉴스는 <성폭력 범죄, 이렇게 예방하자> 제하의 기사를 통해 현직 형사들의 이름을 빌어 성폭력 대처법을 소개했다. 이 기사는 계획적 범죄에 대비해 건조대에 남자 겉옷을 걸어두거나 현관에 남자 신발을 놓아 두어 집안에 남자가 있는 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기사는 성폭력 피해를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일리 있는 대처 요령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 예방’을 ‘여성의 행동’에 초점에 맞추고 있는 점은 문제다. 대처요령 중에는 ‘거센 반항은 신중 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사를 본 독자 중 한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여자로 태어난 게 죄”라고 푸념했다.

여성들의 대처요령은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까지 너무 세세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그에 비해 가해를 막기 위해 조처들이나 ‘가해방지교육’을 제시하는 보도는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최근 동아 TV는 미국 FOX TV가 제작한 대학생들의 성의식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위험한 요구’(17일 방송), ‘위험한 오해’(24일 방송 예정) 2편을 편성해 방송 중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정규교육 과정에서 ‘성폭력 방지교육’이 필요하고 성폭력에 대한 교육은 딸보다는 아들에게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서의 내용을 보도한 대다수 언론들을 ‘여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은 피하라, 남자의 호의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지 말라,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은 미리 피하라, 아는 사람을 만들어 놓아라, 절대 취해서는 안 된다’ 등과 같은 ‘성폭력을 피하기 위한 행동 요령’만을 부각시켰다. 일부 신문은 성폭력 ‘안 당하는’ 7가지 방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가해가 줄면 피해도 준다

성폭력은 ‘여성’만 피해자도 아니고, 여성들이 행동을 조심한다고 해서 막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폭력 예방을 위해서 피해자 주의사항도 필요하겠지만 여전히 ‘당한 사람의 행동’을 문제 삼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에서 지나친 피해예방 강조는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는 것이 될 수 있다.

성폭력 예방이 진정한 예방이 되려면 가해 행위를 막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해예방교육과 가해방지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속에서 ‘성폭력 대처법’은 한 네티즌의 말을 빌어보면 “예방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루나틱 2006/03/22 [17:15] 수정 | 삭제
  • 왜 안 없어지는 것이야. 성폭력 사건 나올때마다 빼먹지 않고 나온다는 거 지겹다.
    여자들보고 조심하자, 몸 지키자, 이러는 것도 피해자유발론이나 다름 없다.
  • dry 2006/03/22 [12:52] 수정 | 삭제
  • 폭스 티비가 제작한 다큐 내용에서 남성들 대상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한국 언론으로 옮겨오면서 쏙 빠진 것은, (이런 기사 쓰는 건 다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성폭력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만큼 한국 언론이 성폭력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많다는 걸 비교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한국언론들은 성폭력을 기사가 되는 일로만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성폭력 안 당하는 기술 식의 기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무 2006/03/21 [20:56] 수정 | 삭제
  • 신문에서 종종 내 몸 내가 지킨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폭력이 여성의 몸을 지키냐, 빼앗기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 같아서 화납니다. 몸 버렸다, 뺏겼다, 이런 표현 문제잖아요.
  • 2006/03/21 [17:02] 수정 | 삭제
  • 친한 사람이 성폭력 피해자라고 해도 그렇게 기사를 못쓸 것 같지 않아요? 말이야 쉽지, 성폭력이 여자가 잘못 대처해서 당하는 게 아닌데, 암만 호신용품으로 무장을 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리고 늦게 다니지 마라, 술 먹고 취하지 마라, 이런 건 딱 성폭력유발론, 피해자에게 화살을 꽂는 반여성적 사고방식이잖아요.

    기자들이나 경찰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봐도, 그 사람들부터 성폭력예방교육을 받고 인식을 바꿔야할 것 같습니다.
  • ... 2006/03/21 [15:35] 수정 | 삭제
  • 여자들만의 일로치부해서 일까요...
    심지어 공영파 티비에서는 부부싸움시 남편으로 부터 덜 맞는 요령..
    뭐 이런것도 버젖이 방송하고 있죠.
  • 상애 2006/03/21 [13:33] 수정 | 삭제
  • 언론보도 성폭력에 대해서 너무 선정적이고 가볍게 취급합니다.
  • zzang 2006/03/21 [03:34] 수정 | 삭제
  • 손목 비틀기 기사는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폭력을 예비피해자들이 예방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 호신술은 필요하겠지만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