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오락쇼로 전락한 여성정책 토론회

논쟁 없이 서울시장 후보들 접대에 그쳐

이박성민 | 기사입력 2006/05/24 [00:18]

TV오락쇼로 전락한 여성정책 토론회

논쟁 없이 서울시장 후보들 접대에 그쳐

이박성민 | 입력 : 2006/05/24 [00:18]
한국여성단체연합,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연합으로 구성된 '생활자치 맑은정치 여성행동'(이하 '여성행동')은 22일 여성신문사와 공동으로 서울시장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 여성단체들이 서울시 정책에 개입하고 시장선거에서 여성들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자리라 생각하여 기대를 갖고 참석했다.

"여러분, 재미있죠?"

하지만 이런 기대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바쁘고 힘든 일정에 있는 후보자들의 긴장을 풀려는 의도'로 하는 사회자 오한숙희씨의 발언(스스로 "너스레"라고 표현했듯)으로 상징되는 '가벼움'이 토론회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시종일관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고, 쟁점이 없으며, 후보자들을 접대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민감한 사안은 논쟁에 붙이기보단 주최 측이 알아서 피해가주며 참가자들의 웃음만 유발하고 끝나버렸다.

토론회 내내 환한 조명과 카메라에 둘러싸인 후보자들과, 왔다갔다하며 잡담을 하거나 신문을 보는 참석자들 사이엔 의견 교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참석자 입장에선 마치 방송국 프로그램을 구경하는 방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후보자들 간에도 토론은커녕 의견 교류나 질의응답도 없었다. 주최 측의 질문에 대해 단답식 대답을 했을 뿐이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여성운동진영에서 후보자들을 초청해 가진 여성정책토론회라고 믿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 토론회는 TV오락 쇼에 가까웠는데, 그러한 분위기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진행된 "OX" 퀴즈였다. 주최 측이 준비한 7가지 단답형 질문에 후보자가 OX팻말을 들어 의사표시를 하는 것으로, 기자들의 가장 많은 사진세례를 받았다. 사회자가 질문을 읽으면, 참석자들이 "하나 둘 셋"하고 외치고, 후보자들이 그에 맞추어 푯말을 들었다. 그러면 청중이 까르르~ 웃고 이어 사회자가 말한다. "여러분, 재미있죠?"

질문내용은 더욱 황당했다. '신체적으로 여건이 가능하다면 직접 출산 경험을 해보고 싶은가', '서울시장이 되면 정수된 물 대신에 서울시 수돗물을 먹겠나' 등의 질문을 던졌는데, 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최 측은 질문의 맥락에 대해서도, 여성정책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보자들이 왜 O 또는 X팻말을 들었는지 의견조차 묻지 않았다.

여성공약, 해주면 좋고 아님 말고?

여성행동 측이 2006년 여성계의 주요 의제 중 3개를 선정했다면서 꼽은 서울시 여성정책이 '서울시 각 동에 국공립 보육시설3개 이상 설치', '5개 성매매 집결지 조속한 폐쇄', '고위직 여성공무원 임용확대 방안'이라는 것도 의아했다. 반면 많은 여성들의 빈곤문제와 노동권이 걸려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김종철 민주노동당 후보가 정책발언을 할 때 잠깐 언급이 된 정도였다. 여성의제를 만들고 선정하는 과정에 과연 여성들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이 된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회자와 패널, 그리고 후보자들 간 진행된 질의응답의 전반적인 내용도 '생색내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성정책 토론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명의 후보들이 내놓은 여성정책이 무엇인지, 각 후보들의 정책 간 차이가 무엇인지 드러내지 못했다. 모든 내용이 단답식으로 이야기됐기 때문에 개괄적인 수준의 발언들에 그친 경우가 많았고, 패널들이 그에 대해 더 구체적인 정책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반박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박주선 민주당 후보는 '민주당에 여성의 일자리 공약이 없다'는 이야기에 대해 '여성정책이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것'이라며, 갑자기 서울시의 기업유치강화와 외국인 투자유치 활성화 등의 공약 이야기를 꺼내며 여성의 일자리 창출과 연관 지어 말했다. 그러나 토론회에선 그저 웃음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또, 강금실 열린우리당 후보는 여성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고학력 실직여성을 위한 신전문가 양성"하겠다는 공약을 냈는데, "신전문가의 예를 들어보라"는 패널의 요구에 마땅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질문을 한 패널도, 토론회의 주최 측도 어떤 대응도 없이 넘어갔다.

현재 소규모 사랑방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로당을 중대 규모로 통폐합하겠다는 정책에 대해 주최 측이 문제 제기를 하자 김종철 민주노동당 후보는 '그런 정책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며 '다른 문제로 질문해달라'고 주문했다. 이 때도 주최 측과 후보가 잠시 서로 무안한 상황이 연출되고는 그만이었다.

여성일자리 창출에 관해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가 '국내경제가 활성화되고 국민소득이 2만~3만 불이 되면 여성의 일자리는 지방자치에서 따로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아도 당연히 생겨난다.'고 말한 것도 문제성 발언이자, 다른 후보들과 입장이나 논의를 들어 토론을 진행시켜 볼만한 주장이었지만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토론회 한 번 했다' 생색내기에 불과

이처럼 토론회는 각 후보자들의 허약한 여성공약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들어보는 정도에 그쳐, 결국 안일한 정치권의 행태에 여성단체들이 변죽을 맞추는 꼴이 됐다.

한편, 여성정책을 요구하는 주최 측이 후보자들보다도 여성주의적 인식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패널로 나온 이은경 여성신문 편집국장은 강금실 열린우리당 후보의 서울시장출마 주요 배경이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였다고 전제한 뒤, 최근 여론조사에서 강 후보 지지도가 하락한 것에 대해 여성유권자들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강금실 후보는 "여성이면 여성을 찍어야 한다는 것은 비민주적인 발상"이라며, 지지도를 비롯한 유권자의 평가는 "후보자가 갖고 있는 정책과 후보자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토론회가 끝난 후 이곳저곳에서 "이게 뭐냐", "변별력이 없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뿐이다" 등의 불만이 토로됐다. 후보자들 간 정책 비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논쟁도 없었으며, 여성정책을 이행하라는 압력도 넣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여성정책 토론회 장을 나서며 과연 여성들이 얻어낸 것은 무엇인가 묻게 됐다. 그저 이런 토론회 한 번 했다는 여론홍보용 이벤트였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여성으로서 허탈감과 분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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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 2006/05/30 [15:39] 수정 | 삭제
  • 여기 저기 선거유세다 해서 바쁜분들이 많습니다. 여성이니만큼 여성후보를 찍어야 되다고... 당선이 되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바꿜것이라고 하는데 전 잘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이럴땐 내가 여성주의적 관점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인가 의심이 갑니다. 근데 여시서 이런글을 보니 참 ....
  • 2006/05/25 [13:45] 수정 | 삭제
  • 어떤 후보가 어떤 부분에서 괜찮은 정책을 냈는지, 반대로 형편없는 정책을 냈는지 알 수도 없는 토론회를 했군요. 선거 때 후보들 불러다 토론회를 하는 이유는 그런 걸 알아보려고 하는 걸텐데 너무 한심합니다.
  • 우체부 2006/05/24 [22:31] 수정 | 삭제
  • 여성정책토론회 하이라이트가 OX퀴즈였다니 충격이군요.
    >
    사진 속 네 후보들 중에 한 사람은 마음 아프네요.
  • .......... 2006/05/24 [17:01] 수정 | 삭제
  • 관변단체냄새가확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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