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시작된 성폭행 관련 언론보도는 지난 2월 ‘용산 어린이 성추행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을 정점으로 매일 쏟아져 나왔다. 연쇄 성폭행범, 여성 재소자 성추행 사건, 최연희 의원 성추행 사건으로 이어지는 성추행, 성폭행 사건들은 마치 집밖에 나서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넘쳐난다. 게다가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는 더욱 늘어가는 추세라고 한다.
‘말 잘 듣는 아이’ 원하는 사회 그렇지 않아도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두려움과 긴장 상태로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아이를 둔 부모라면 성폭력이란 단어조차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 불안은 점점 커진다. 혹시 등교 길에? 하교 길에? 아파트 옥상은? 지하 주차장은? 괜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가 하면, 하교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온갖 불안한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성폭행, 성추행 사건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도서관에서 책 읽고 돌아오는 아이를 찾아 학교까지 간 일도 있다. 내가 아이를 위해 하는 말이란 기껏해야 ‘모르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거나 오라고 하면 절대로 따라가지 말아라’, ‘누가 네 몸을 만지려고 하면 얼른 도망가라’ 정도다. 고작 10살 정도의 어린이가 남자 어른의 완력에 이길 리 없으며, 강제로 차에 태우거나 뉴스에 나온 대로 몰래 뒤따라 가서 범행을 저지른다면 부모가 아무리 주의를 주고 감시한다 해도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리 만무한 상황이다. 아이가 안전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인데 이런 상황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부모로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학교에서 성희롱 성폭력 예방법에 관한 문서를 나누어 주었다. 학교에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 일단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내용을 보았더니 다음과 같다. 혼자 심부름 보낼 때 유의하자, 등하교 길에 되도록 친구들과 같이 가게 하자, 누군가 싫은 행동을 할 때 큰 소리로 단호하게 싫어! 하지마! 등 의사표현을 하게 한다, 엘리베이터에 이상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면 함께 타지 않는다, 외출 시에는 너무 화려한 복장을 하지 않는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외출을 피한다, 어두운 골목길을 피한다, 호신용으로 호루라기를 준비해 주면 좋다 등등. 여성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내용들이다. 평소 아이에게 주의를 하고 있는 사항들이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부분은 ‘누군가 싫은 행동을 할 때 분명히 큰 소리로 단호하게 싫어! 안돼! 하지마! 라고 의사 표현을 하게 한다.’이다. 그냥 보면 당연한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정말 아이가 단호히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른들을 공경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도록 교육받아왔다. 교실이나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고, 쉬는 시간에도 얌전히 독서를 하고, 어른을 만나면 인사 잘하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말대꾸를 하면 버릇없다고 꾸중을 듣는다. 어른들의 영향이겠지만 심지어 같은 학생끼리도 학년이 낮은 아이가 말대꾸를 하면 시쳇말로 ‘싸가지 없다’고 서로 비난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유독 성추행의 위험 속에서만 아이가 어른 혹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싫어! 안돼! 라고 단호히 얘기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이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그 순간에 판단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동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와 아는 사람인 경우가 40%를 넘는다고 한다. 얼굴을 아는 어른에게 아이가 그 상황에서 거부 의사를 단호히 밝힐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그것은 성인의 경우에도 힘든 일이 아닌가. 타인의 몸을 존중하는 성교육이 ‘우선’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아이가 싫다고 거부하다 오히려 생명을 잃는 최악의 상황도 있기 때문에 싫다고 단호히 얘기하라고만 가르치기도 어렵다. 아이에게 아는 사람도 조심시켜야 하는 이 현실이 너무나 무섭다. 아이 나름대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부모가 24시간 같이 지낼 수도 없으며 아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현재 부모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이 조심 또 조심 시키는 일밖에 없을까. 우리가 받아왔던 ‘여자는 다소곳해야 한다’는 교육이 얼마나 한 인간의 성향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내 아이가 자기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아이에게 방어적으로 인생을 살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아이가 자신의 몸의 권리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 의사결정을 평소에 존중해주는 것이 실효성 있는 예방책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성폭력 가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성교육을 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그것이 왜 나쁜 일이며, 한 사람의 일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아이들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른 시기부터 알았으면 좋겠다. 현재 어른들의 문화와 행태는 결코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성매매는 물론이고,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문화에, 심지어 성추행을 하고도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는 공인까지 있으니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할 따름이다. 따라서 성폭력을 막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더 높은 직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윤리에 관한 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십대들에겐 더욱 현실성 있는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폭력을 하면 안 된다 수준이 아니라, 사람을 인격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이 사회 전반에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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