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여성, ‘나’의 삶을 찾아

강화에 들다

이옥임 | 기사입력 2006/08/15 [23:32]

중년여성, ‘나’의 삶을 찾아

강화에 들다

이옥임 | 입력 : 2006/08/15 [23:32]
<일다칼럼에 '변화와독립'란이 신설됐습니다. 여성들 삶의 정체성 찾기와 관련한 '변화'에 얽힌 사연과 시도들, 그리고 '독립'이라는 화두에 대해 고민하고 소통하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거창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변화의 계기를 발견하고 독립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는 작은 실천과 생각들을 담을 예정입니다. 일다칼럼은 독자들에게 항상 열려있습니다. 기고를 통해 소중한 목소리와 경험들을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언니와 강화유람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해안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주욱 달렸다. 광성보 지나고 함허동천 지나고 동막 지나는 동안, 군데군데 전망 좋은 곳마다 팬션이니 모텔이니 요식업소가 들어서 있는 것이 하루가 다르단 얘기를 하며 몇 구비를 더 지났다.

“이런 곳에 살면 절로 살찌겠어잉!”
“그러게나 말이다. 이런 좋은 곳에 살아볼 날이 있을끄나?”
“마음 먹으면 안될 법도 없지 뭐.”

이렇게 시작된 말이 한두 집 부동산에 들르게 되었고, 일이 되려고 그랬던지 돈도 안 가지고 간 주제에 동막 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뒤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을 두르고 앞에는 아담한 들판과 그 너머 바다가 아련한 전망 좋은 집을 소개 받게 됐다.

길갓집이라는 점을 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집이라, 마당이 넓고 창 앞에 소나무 두 그루가 운치를 이루고 있어 두 말 없이 계약해버렸다. 보증금 1천만 원에 수도세와 전기세를 포함해서 월 22만원.

간도 크고 통도 크지, 남편에겐 몇 차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어디 공기 맑은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얘기만 비춘 상태인데, 덜컥 계약을 해놓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뭐, 내 인생 누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이쯤 해서 ‘나’를 찾아 떠나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와 달동네에서 내 인생 가장 잔인했던 세월을 거쳐, 25년여 간 교직생활을 하고 아이들 키우며 보내버린 시간들이 덧없게 느껴진다. 처음엔 숨도 못 쉴 것 같았던 서울의 악취에 어느덧 적응해 살아왔지만, 일로 먹고 살아야 할 시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답답한 서울에 남아 남들처럼 집값만 올리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들고 보니, 소문을 들은 친구들이 궁금증에 때 맞추어 계절맞이까지 겸해 놀러 오느라 몇 달째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친구들마다 반은 부러움, 반은 걱정으로 한결같은 인사말이, “너무 좋다야! 그런데 너 혼자 어찌 지낼래?”

혼자에 이력이 붙은 걸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차피 어디 있어도 혼자인데 오히려 강화에선 남의 땅이지만 하루에 손바닥만큼씩 일궈 소채 가꾸며 그것들과 대화하는 맛이라도 있는 걸. 해 넘어가기 바쁘게 개굴대는 개구리 울음이랑 먼 산 소쩍새 울음 벗하여 깜깜 절벽 같은 밤을 지새우는 맛도 멋이라면 멋인 걸.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농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이런 곳이 있어 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이 있는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이 고달프긴 하지만, 늘그막에나마 이런 맛에 취할 수 있음이 천군만마를 얻은 장군만큼이나 흐뭇하고 여유롭다.

자꾸만 시들어가는 몸과 마음을 다잡고 인생에서 뭔가 이뤄보리라는 가당찮은 꿈까지 이해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 몸 져 누우면 끄집고 병원 데리고 다닐 사람이 지 살기도 바쁜 우리 둘째 말고는 없으니, 이렇게 억지를 부려 건강을 돌려놓아야겠다는 가상함만은 인정 받고 싶다.

누가 뭐래도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만의 생활을 시작하며.
이제 나는 강화인이다. 적어도 만 2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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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ee 2006/08/29 [22:16] 수정 | 삭제
  • 어머니와 저의 삶에서도 독립은 중요한 주제이긴 했는데, 당당하고 용감하지 못한 것을 탓하게 되기도 하고요.
    여성들의 독립에 대한 이야기 너무 기대가 됩니다.
  • 오리 2006/08/18 [16:27] 수정 | 삭제
  • 여행 한 번 떠나기 힘든 것이 아이키우는 엄마, 그리고 중년여성의 삶인 것 같은데, 이런 글을 보니 반갑고 기쁘네요.
  • sohyung 2006/08/17 [18:31] 수정 | 삭제
  • 나와 다른 여성들의 변화하는 삶, 독립적인 삶에 대해서 많이 접하고 싶어요.
    그럼으로써 저도 제 삶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기사 통해서도 종종 그런 걸 느꼈는데 앞으로 더 기대가 되는군요.
  • 돋보기 2006/08/16 [16:44] 수정 | 삭제
  • 1천에 22만원이면 저렇게 환경 좋은 곳에서 살 수도 있는데, 서울에선 지하 방이나 비좁고 환기 안되는 방 아니면 얻기 힘든 액수죠.
    그런데도 서울에서 안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꼭 일자리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데- 어리석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 . 2006/08/16 [13:46] 수정 | 삭제
  • ...가족들을 위한 삶과 자신을 위한 삶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만의 생활' 힘차게 해나가시길...
  • 아카시아 2006/08/16 [07:31] 수정 | 삭제
  • 어머니한테 보여드리고 싶은 글이란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