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성적소수자 매체 “QueerFly”

치병을 위한 바늘 같은 이야기 쓰고파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6/08/29 [20:34]

서울대 성적소수자 매체 “QueerFly”

치병을 위한 바늘 같은 이야기 쓰고파

김윤은미 | 입력 : 2006/08/29 [20:34]
‘퀴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이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이성애자) 사람들이 케이블 등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퀴어 애즈 포크>나 <엘 워드>를 떠올릴 것이다.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브로크백마운틴>이나 “마성의 게이”로 유명했던 <메종 드 히미코>를 언급할 수도 있겠다. 혹은,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왕의 남자>가 퀴어 코드를 차용해서 인기를 얻었다고 분석한 수많은 매체비평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대상들이 어디까지나 TV 화면과 스크린에 나오는 과정에서,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표백’되기 쉽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성적소수자 동아리 QIS(큐이즈, Queer In SNU)에서 발간한 매체 “QueerFly”는 이제 오늘을 살고 있는 대학 퀴어인, 그들이 생생하고 ‘비릿한’ 날 것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QIS(www.snumaum.org)는 11년 역사를 지닌 동아리다. 지금까지 동아리방이라는 공간을 지켜내면서 성적소수자라는 ‘존재’ 그 자체로 운동을 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소통의 경로를 만들고자 매체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소통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경로가 없었던 많은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렌스젠더)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해내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편집장의 말’에서는 “퀴어플라이(QueerFly)”를 만들게 된 계기로, ‘치병’을 위해서였다고 토로한다. 퀴어들의 이야기를 모두 추방해버린 답답한 이성애중심 사회 속에서, 손가락을 따서 체증을 낫게 해주는 바늘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QueerFly” 창간호 기획은 시선이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시선은 모순적이다. 역사적으로 성적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시선 그 자체에서 배제되어 왔다. 한편 최근에 들어서 퀴어 코드가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게이, 트랜스젠더 등의 이미지가 생겨나긴 했지만, 성적소수자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라기보다는 일반들의 ‘판타지’와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증)가 적절하게 뒤섞인 이미지에 가까워 실제 성적소수자의 이미지에는 닿지 않는다.

기획에 묶인 여러 글에서는 일상적으로 성적소수자들이 어떻게 일반의 시선에서 배제되어 왔는지, 또한 일반의 어떤 억압적인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경험담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들의 글은 기획의도에서 밝힌 대로, 단정하게 정리된 글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거칠고도 진솔하게 토로하는 편에 가까워, 보는 이들이 읽고 난 뒤 기억에서 쉽게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선의 권력”에서는, 일상에서 동성애자가 얼마나 비가시화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일례로, 어느 수업 시간에 동성애 결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뜬금없이 교수가 “그래도 婚姻(혼인)의 한자에 모두 계집 女가 들어가니” 동성애자(남성을 의미)끼리의 결혼은 무리가 아닐까라는 농담을 던지고, 그 뒤로 동성애 결혼 논의는 농담과 섞여버렸다. 글쓴이는 교수와 학생들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보기만’ 했어도 그런 농담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시선의 이중성”에서는,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에 존재하는 시선의 문제를 고민한다. 이성애자들의 외모지상주의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나타나는 미적 기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과연 무엇인지.

한편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선은, 모든 개인을 남성/여성으로 가르려는 시도 그 자체가 폭력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보고 보이는 몸”에서는 트랜스젠더로서 살아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밝히고 있다. 신분증의 문제, 군대 이야기에 대한 대처 등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성별이라는 변수가 깊숙하게 기입된 현실 속에서, 글쓴이는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완벽하게 숨기고 싶은 충동과, 이와는 모순적으로 아예 다 드러내고픈 충동을 함께 느낀다. 이 같은 분열적인 상황의 책임은 결국 사회의 몫일 테다.

“트랜스젠더와 외현적 몸”에서는, 남녀 양성으로 개인을 구획하는 사회가 존재하는 한,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몸을 부정하는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시선의 권력”의 글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 자신을 뼛속부터 바꾸라는 물질적인 폭력”이었으며, 이제는 그 시선을 비틀어 ‘못된 불장난’이라도 해보고 싶다고 토로한다. 이성애중심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굳어진 현실이기에, 역설적으로 이성애중심적 문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폭로하는 것 또한 비판의 방식이 된다.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에서는 수많은 이성애 구도의 노래가 쏟아지는 가운데 남성보컬이 부르는 노래를 여자가 부르거나, 여성보컬이 부르는 노래를 남성이 부르면 일시적으로 이성애 구도가 흐트러지는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특히 남성보컬이 부르는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에 나오는 ‘니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라는 대목을 둘러싸고, 이성애자들이 이 노래가 동성애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엄청나게 우기는 모습은 결과적으로 “동성애적 혐의를 가지는 곡은 증명을 통해서 이성애적인 곡으로 거듭”나게 됨을 보여주는 씁쓸한 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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