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크면 뭐 할거니?”
“나? 나는 독립할거야.” 나는 그랬다. 어린 나이에도 독립하고 싶어서 몸살을 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곳은 포항이다. 포항하면, 사람들은 의례히 쇳가루 날리는 포철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인식하는 포항은 포철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뜨내기 인생이 모여 사는 지방 소도시는 그들의 삶을 닮아 부박하다. 그래서 비록 하늘을 쇳가루가 자욱히 덮지는 않아도 부박한 작은 도시답게 삭막하고 메마르며 적당히 거칠고 소비지향적이다. 유별스러울 정도로 동화와 소설 속에 파묻혀 소설 속 풍경을, 아름다움은 있지만 일상의 건강은 잃어버린 세계를 재현하려던 내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경박함이었다. 그래서 호시탐탐 집을 탈출하기를 꿈꾸던 나는 중3이 되자 포항과 가깝지만 자취를 해야 하는 경주로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집안에서는 반대했다. ‘어린 계집애가 집을 떠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부모님에겐 내가 ‘계집애, 그것도 어린 계집애’에 불과했고 그것은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같아서 보살피고 큰 일이 있을 때까지 숨겨둬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발끈했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으로 인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만큼의 어떤 준비도 안 되어 있음을 뜻했다. 그러면서 “빨리 스무 살이 되어야지” 별렀다. 대학(4년제 이상의 모양새를 갖춘)에 가려면 대구나 부산, 서울 등 대도시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번의 낙방 끝에 드디어 서울로 입성하던 날, 나는 독립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시작된 20대는 해방구였다. 하지만 치기 어렸고 불완전한 해방구여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해방구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도 가끔씩 부모님의 협박(공부 안하고 네 멋대로 할 거면 학비며 생활비를 끊겠다)에 적당히 머리도 조아리고 이따금 반항을 해야 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말씀만 하실 뿐 계속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어서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20대의 짧은 독립기를 맛보았다. 독립이 가져다 주는 자유로움을 맛보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가져다 주는 버거움에 차츰 지쳐갈 때쯤 나는 두 가지 기로에 서 있었다. ‘결혼이냐, 독신이냐’ 마음은 독신에 이끌렸지만 주변에 좌표가 될 만한 독신의 모습도, 독신에 대해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가르침도 접하지 못한 나로서는 편하게(?) 관습이 가져다 주는 무난함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가장 무난해 보이는, 그래서 얼마쯤은 개겨도 되는, 더불어 외조도 적당히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택해 결혼했다. 하지만 이후 내 삶이 결코 무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신혼여행 첫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고 악의에 찬 결혼생활을 10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부당한 시선을 물리칠 수 있는 단호함과 홀로서기 할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게 정확한 대답이다. 겉으로는 똑똑한 척, 당당한 척 소리치며 살아왔지만 나는 ‘독립’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독립’을 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인생에 있어서 ‘독립’이 어떤 의미인지, 일상 속에 어떻게 ‘독립’을 풀어가야 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집을 박차고 나온 1년은 “내가 누군데, 감히…” 하는 지극히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차갑게 버티고 서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오만함의 다른 표현은 자신 없음이며 나약함이다. 나는 그렇게 자리 잡지 못하고 내 나약함을 오만함으로 위장하며 보냈다. 그 후 1년은 질투와 억울함이 내 생활을 규정하고 있었다. 찬란한 봄 햇살과 풀빛 자연에도 괜시리 질투가 났다. ‘내 인생에서 찬란한 봄은 지나갔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구나’ 생각하니 녹색 여린 잎 하나에도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는 사람보다도 자연, 그것도 푸른 빛을 발하는 잎사귀가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암흑기로 상실된 내 30대가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서글프고, 다정한 젊은 부부를 봐도 가슴이 싸해지고, 소위 자기분야에서 자리 잡고 자신감 넘치는 동기들을 봐도 울컥했다. 그렇게 상실한 30대가 온통 억울함이었다. 지금도 30대를 떠올리면 우선 캄캄한 암흑이 떠오르고 그 다음에는 욕설과 고함, 증오와 배척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 이렇게 편안하게, 행복하게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3년에 걸친 이혼소송 기간을 통해 나 자신도 성찰하고 결혼제도가 갖는 의미도 분석해보고 페미니스트들과 공부하며 자매애도 다지고…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 독립할 수 있는 힘을 쌓아 온 것에 있다. 더불어 결혼 10년 동안 어쩔 수 없이 손 놓았던 옛일 거리들을 찾아서 하고 있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비록 월급은 적지만 내가 평생 하고 싶던 일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만족한다. 아이들도 넘치게 자기 일들을 잘해가고 있고 이혼 전보다 훨씬 구김살 없이 밝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철이 없는 것도 내겐 힘이 된다. 너무 철들면 아이들에게 치유해야 할 아픔이 있다는 반증이니까. 올 초 대법원에서 이혼 확정 판결이 나 구청에서 호적정리를 하는데 “복적할 거냐”고 물어서 너무나 당당하게 “일가창립이요” 했다. 일가창립을 하면서, 내가 호주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사실 그 과정은 너무나 단순하다)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느라 혼났다. 비록 부실한 호주제로 단독호주지만 그리 나쁘진 않았다. 지금 여기서 그때 못다 지른 소리 한 번 질러 보련다. “나, 일가창립했다!!!” “너, 다음에 뭐 하고 싶니?” “나? 나는 일생을 유목하고 싶어.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의 성씨가 아닌 나 자신의 이름으로만 불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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