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passing)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백인과 흑인, 그 어느 인종도 아닌 우리로서는 손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피부색이 다른데 어떻게 패싱이 가능하냐고. 하지만 흑인과 백인,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산 아메리카 대륙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의 벽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함께 사는 이상 흑인과 백인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게 될 테니.
흑인여성작가 넬라 라슨이 <패싱>을 쓴 1920년대는 전후 흑인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패싱’ 인구가 급격히 팽창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즉 '가난하다/아니다’의 문제로, 더 이상 흑인과 백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패싱>은 흑인들의 ‘패싱’을 통해 소수자로서 흑인들이 지니게 되는 심리가 어떤 것인지, 흑인과 흑인 사이를 흐르는 연대적인 심리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지 파헤친 소설이다. ‘패싱’은 흑인이 백인을 속이는 일종의 무기이지만, 반대로 흑인이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삶을 죄어버릴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그래서 자신의 일상을 엄격히 지키려는 주인공 아이린은 흑인출입이 금지된 호텔이나 미용실을 이용할 때만 제한적으로 ‘패싱’을 한다. 아이린이 백인인 척하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흑인이 접근할 경우 백인처럼 무시해버리는 것. “그들은(백인들은) 언제나 그녀(아이린)을 이탈리아 사람, 스페인 사람, 멕시코 사람, 또는 집시로 보았다.” 즉, 누군가 ‘패싱’을 하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경우, ‘패싱’은 절대로 들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특정한 요소 때문에 차별을 당해 본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부정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아이린은 “흑인이 백인행세를 하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백인이 흑인인 척하기란 그리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소설은 흑인공동체 사이에서 가장 완벽하게 ‘패싱’을 해냈다고 평가 받는 클레어 켄드리라는 매혹적인 여자를, 클레어의 친구 아이린의 눈에서 바라본다. 클레어는 아이린과는 달리 ‘패싱’에 자신의 삶 자체를 걸고 뛰어들었다. 그녀는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고향을 증오했으며,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은 채 부유한 금융가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문제는, 클레어의 남편이 흑인을 끔찍이 증오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클레어가 백인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클레어의 피부가 자꾸 검어진다고 조롱하며 그녀를 ‘깜둥이’라고 부른다. 매일 남편에게 ‘깜둥이’로 불리는 클레어의 마음이 어떤지, 지은이는 클레어의 입을 통해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다. 스스로 지워버린 자신의 타고난 조건을 타인이 짓밟아버리고 있어도 절대로 내색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상태를. 요컨대 클레어는 스스로 족쇄에 갇혀버린 것이다. 클레어가 족쇄에서 나오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친구 아이린은 불안하다. 아이린이 보기에 클레어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면서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이다. 흑인이자 중산층으로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려고 강박적으로 애쓰는 아이린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열정적인 클레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린의 삶은 중산층의 표본에 가깝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중산층 가정을 꾸린 주부로 파티와 바자회에 바쁜 아이린은, 안정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자신의 기준을 남편과 자식에게 강요한다. 그래서 아이린의 가족은 아이린이 안정을 추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건조하게 변해간다. 바로 그 때 클레어가 나타난다.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아이린처럼 흑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보내며 아이린의 파티에 성실하게 참석한다. 그래서 아이린은 클레어가 두렵다.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 그것은 아이린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클레어와 아이린의 갈등은 복합적이다. 일차적으로 그녀들의 갈등은 욕망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과 일상을 지키려는 사람의 갈등이지만, 그 저변에는 ‘패싱’을 했다가 흑인공동체로 돌아오려는 사람 대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흑인의 갈등이 깔려있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클레어의 정체를 폭로하고 싶다. 그러나 아이린은 같은 흑인으로서 클레어를 클레어의 인종차별적인 남편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좋은지 갈등한다. 어쩌면 클레어를 찬탄하고 시기하듯 바라보며 클레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린의 시선은, 클레어라는 여성에 대한 억누른 욕망일수도 있다. 클레어는 “흑인들 스스로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용서하고, 경멸하면서도 찬미하고, 묘한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호하는 모순적인”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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