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숭고함을 비웃고 해학으로 되살아나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

이성곤 | 기사입력 2007/05/17 [16:26]

햄릿, 숭고함을 비웃고 해학으로 되살아나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

이성곤 | 입력 : 2007/05/17 [16:26]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과 사악함이 빚어내는 갈등과 복수의 비극성.’ 셰익스피어 <햄릿>의 ‘영원한’ 주제다. 그러나 여기 <햄릿>의 비장미와 숭고함을 비웃는 한 편의 연극이 있다.

의정부 국제 음악극 축제에 초청을 받은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그것이다. 5월 14일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선을 뵌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는 고귀한 비극의 주인공 대신 익살광대들이 등장해, 생에 대한 집착에서 빚어지는 실존적 갈등과 고민을 거침없이 조롱하며 인간 삶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숙부이자 아버지인 클로디어스, 어머니이자 숙모인 거투루드.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햄릿. 마치 오래된 오이디푸스의 테제(These)를 연상시키는 햄릿의 비극성은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는 해골인형으로 희화화된다.

존재론적 고민에만 빠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소심한 강아지’ 햄릿에 대한 조롱이자 칼날 같은 해석이다. 그의 몸통은 흰색의 긴 광목천이 되었다가, 느닷없이 우산이 되어 날 선 고슴도치가 되었다가, 깡마른 나무지팡이가 되기도 한다. 햄릿의 꿈과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실존적 고뇌의 표현이다.

심지어 햄릿의 머리통은 익살광대들의 공놀이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해골 같은 머리통이 저 영원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다니!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에서나 가능할 이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이고 도전적인 상상력은 무대를 통해서도 재현된다.

만장처럼 뒷배경을 이루며 서 있는 나무 장식들, 상여같이 네 귀퉁이에 대나무가 꽂혀있는 수레,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관문인양 무대 여기 저기를 옮겨 다니는 관. 무대는 죽음을 지향한다. 나무 장식들 가운데 장승처럼 나란히 서 있던 클로디어스와 거투루드는 어느 순간 거대한 인형으로 돌변해 무대를 압도한다. 그들의 권력욕과 탐욕이 시각적 크기로 형상화되는 장면이다.

수레는 죽은 햄릿 왕을 실어 나르는 상여이자 폴로니어스의 죽음을 부르는 거투루드의 침실, 자살 직전 오필리어의 방이 된다. 때로는 기도하는 클로디어스의 교회가 되기도 하고, 극중 인형극을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복수를 결행하러 가는 햄릿의 마차가 된다.

관에서는 죽은 오필리어의 유령이 길게 늘어진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솟아오른다. 머리카락은 오필리어의 삶과 사랑에 대한 연민의 길이만큼 길다. 인물들의 내면은 이처럼 무대와 오브제를 통해 공간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이미지만이 무대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죽은 것들의 ‘진지함’과 익살 광대들의 유희가 교차하면서 제3의 에너지가 생성되는데, 이 에너지는 새로운 차원의 무대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웃음과 해학과 골계가 그것이다.

캐릭터와 광대, 연기와 조롱과 장난 사이를 숨 가쁘게 오가는 다섯 광대들의 익살을 통해 웃음 속에서 처연함이, 해학 속에서 덧없는 삶의 본질을 꿰뚫는다.

일종의 메타 <햄릿>이랄까. 원효대사의 해골박 일화와 무덤 장면의 절묘한 만남, 톡톡 튀는 광대들의 경쾌한 노래 속에서 서양의 고전 <햄릿>은 이렇게 동양적 질감으로 되살아난다.

공연 정보: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저녁 8시 국립극장 하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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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7/05/24 [15:20] 수정 | 삭제
  • 야외극장,
    생음악,
    모든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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