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도시락 이야기
행복한 식탁을 만들다
이정숙 | 입력 : 2007/06/26 [04:26]
“이번 정류장은 시청입니다.”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 막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차내는 다소 복잡했다. 하차문 바로 앞에서 사람들 옆에 끼여있던 터라, 내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살짝 옆으로 비껴섰다. 차문이 닫히고 차가 막 움직이려고 할 때, 한 아주머니가 급하게 내 몸으로 체중을 실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밀려왔다. 아직 내릴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기사 아저씨가 급하게 차문을 닫았던 탓이다. 미처 못 내린 승객들이 차문이 닫히려 하자 마음이 급했던 탓에, 앞 사람을 마구 밀쳐댔다.
그때, 내 몸 위를 살짝 덮쳤던 아주머니의 쇼핑백에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좁아서 발밑이 언뜻 볼 순 없었지만, 이내 쏟아진 것들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김치 냄새였다. 다시 열린 차문으로 사람들이 재빨리 내리고 나가자, 김치가 쏟아진 광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김치만이 아니었다. 이층짜리 찬합에서 2층에 있던 김치는 아예 차바닥을 적시고 있었고, 1층에 있던 하얀 밥 덩어리는 일부가 쏟아져 있었다.
“아, 뭡니까? 뭘 쏟았으면 잘 치워주세요.”
버스기사는 백미러로 뒤쪽을 살피면서 차문을 닫았다. 버스는 출발했다. 나는 가방을 뒤졌다. 그러나 아주머니에게 건넬 휴대용 휴지 한조각 없었다. 나처럼, 어떤 사람도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그 사람의 일을 못본척 했다. 도시락이 쏟아지는 바람에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한 아주머니는 찬합에 다시 김치를 퍼 담으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약간의 짜증 섞이기도 했지만, 민망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비루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모든 것이 사람들 앞에 공개된 것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봐서 그런지도 모른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두들 도시락을 싸다니던 예전엔 가방에 김치물이 번지고 했던 일도 많았는데…. 매일 먹고 사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 그게 뭣이 부끄러운 일일까. 쏟아진 밥이 혹시 저녁에 먹을 도시락이 아니었을까. 2인분은 족히 넘을 밥에, 김치뿐이라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야 할텐데. 창밖으로 스치는 건물들의 풍경을 내다보며, 느낌으로는 아주머니가 바닥을 말끔히 닦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몇 년 전, 버스 안의 일이다. 최근까지도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떠오르던 영상이다. 학교 다닐 시절 친구들과 같이 먹던 점심시간도 떠오른다. 어쨌거나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락은 들고다니기 거추장스럽고 비루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최근까지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밥은 대부분 사먹었다. 먹는 일은 최대한 간편하고 시간을 절약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절약하고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밥을 사먹는 건 당연했다. 도시락은 거추장스럽고, 도시락을 싸다녀야 하는 처지는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점심 저녁 시간에 문을 나서면 동료들과 ‘오늘은 뭘 먹을까?’, ‘어느 식당으로 갈까?’를 정하는 일이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인근 식당이 새로 생길라치면, 얼른 가서 맛을 보지만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서 먹는 밥에 질릴대로 질린 상태였다.
그러다가 직장에서 한 동료가 ‘도시락’을 혼자 싸다닐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가난한 형편에 식대가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월급 중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은 건, 다들 마찬가지였지만 선뜻 동참하기는 힘들었다. 먹고 사는 게 쉽지 않다더니, 그 말이 맞네. 먹는 게 최대한 간편해질 방법은 없을까.
그러다가, 모두들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봄여름가을겨울 따뜻한 밥을 먹기 위해 밥솥은 각자 갹출해서 장만했다. 각자 집의 냉장고에서 남아도는 김치나, 마른반찬 하나씩만 싸오기로 했다. 사무실에 상주하는 인원이 네다섯은 되니까, 반찬이 다섯 가지면 충분히 먹지 않을까. 가끔 마음내키는 사람이 간단한 국거리를 끓이기로 하고, 거추장스러운 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웬걸, 거추장스럽고 비루하게만 느껴지던 도시락이 이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예상치 못했다. 어떨 때는 집에 묵어가던 김치 하나 달랑 작은 반찬통에 담아가기도 했다. “혼자 도시락을 싸다닐 예정”이라고 야무지게 말했던 그녀는 계란말이, 새우볶음 등 인터넷을 뒤져 도시락 반찬 하나씩 준비해왔다. 대여섯가지 반찬밖에 되지 않았지만, 매번 금방 한 밥을 먹을 수 있어, 넉넉하게 한 밥이 언제나 조금씩 부족했다.
먹는 시간을 최대한 아끼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던 목표가 일부 달성됐다. 실은 식당을 전전하며 소비하는 시간도 만만찮다. 내내 식단이 불만족스러워 한번씩 멀리까지 나가며 쓰는 시간도 꽤 됐다.
돌아가면서 잠깐 쌀을 얹혀 놓고, 설거지도 돌아가면서 했다. 도시락통들이다 보니, 상 차릴 것도, 설겆이 할 것도 많지 않아 모든 것은 금방 끝났다. 그리고 작은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예전에 IMF 사태가 터지고 도시락을 싸다니는 직장인들 얘기가 잠깐 나온 적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이 하나같이 “식비를 줄이기 위해, 남편 도시락을 싸줘 마음이 아프다”는 식이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식당으로 몰려가고, 혼자서 텅빈 공간에서 도시락밥을 먹어야 한다면 밥맛이 그리 좋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 조금씩 역할을 분담하고, 조그만 반찬통에 한 가지씩 음식을 준비해온다면 풍성하고 행복한 식탁을 준비할 수 있다.
도시락을 싸다니는 동료들을 위해 예쁜 가방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멀리 버스를 타고 다니는 동료에게는 어깨에 맬 수 있는 긴 끈이 달린 가방을, 예쁜 것을 좋아하는 동료에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는 가방을, 실용성을 강조하는 사람에겐 최대한 실용적인 도시락 가방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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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테 2007/07/01 [12:04] 수정 | 삭제
- ㅁ 2007/06/28 [15:45] 수정 | 삭제
- n 2007/06/27 [11:01]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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