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녀의 업무는 ‘보조지원’

대기업 정규직으로, 파견직원과 함께 일하며

배일희 | 기사입력 2007/12/25 [01:06]

[기고] 그녀의 업무는 ‘보조지원’

대기업 정규직으로, 파견직원과 함께 일하며

배일희 | 입력 : 2007/12/25 [01:06]

얼마 전 친한 직장동료에게 선물을 받았다. 그녀는 내게 “일에 시달리는 것 같아 보인다”며, 생일도 아닌데 원목으로 된 편지함을 쑥쓰럽다는 듯 내밀었다.

아침 7~8시면 집을 나서 밤 11~12시까지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과로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무렵이었다. 같은 부서에서 매일같이 지친 얼굴로 출근하는 나를 보고, 몰래 선물을 준비했었나 보다. 정성스런 포장을 보니, 웬지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절반의 임금, 보너스와 휴가도 없는 ‘나의 동료’

난 대기업 정규직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부서에서 유일한 파견사원이다. 난 ‘기획업무’ 담당 정사원으로, 그녀는 ‘보조지원업무’ 담당 파견사원으로 일한다. 그녀는 내가 받는 월급의 절반을 받는다. 게다가 보너스와 유급휴가도 받지 못한다.

대학시절 학비를 벌고자 단기간 저임금 사무 아르바이트를 이것 저것 해보면서, ‘비정규직으로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일할 수는 없노라’ 결심했다. 대학 졸업반 때는 오로지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공채를 통해 지금 회사에 입사했다. 나는 안정적으로 경력을 쌓아가며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여성에게 얼마나 제한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한 지 1년 즈음 지나고 나니, 마냥 내 노동환경에 흐뭇해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는 미혼의 정규직 여사원인 나에게 꽤 많은 임금을 주고 있으며, 생리휴가와 유급휴가 등이 비교적 잘 보장되어 있다. 그렇지만 요새 나는 남들이 다 좋다 하는 이 일자리가 불편하고, 힘들다.

동료인 그녀는 파견업체에 고용된 파견사원으로,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서 일한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여러 대기업에서 ‘보조지원업무’ 파견직으로 일해왔다. 지금 회사의 기획부서에서 그녀와 내가 하는 일이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아이디어를 짜고 일을 결정하고 기획하면, 그녀는 그것을 내 지시대로 수행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벤트를 벌인다는 계획이 생기면, 나는 이벤트 기획의 대략적인 개요를 짜고 어떤 세부적인 사항을 넣을지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세부사항 중 한 부분을 도와달라 요청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업무는 나의 업무와의 관계에서 보조업무인 것이다.

그렇지만 회사 차원에서도 그녀의 업무가 ‘보조지원업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부서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업무는 꼭 필요한 업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조업무’임을 이유로 1년마다 재계약이 될까, 안될까 불안에 떨며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는 게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회사는 입사 때부터 정규직 사원들에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우수인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규직 중 서울출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파견직인 그녀는 지방대를 나왔다. 회사는 파견직 사원은 어디까지나 파견이며, 보조업무를 맡고 있노라 했다. 나는 그 말이 위선이라고 느낀다. 공채에서 비율이 높았던 영어실력은 실상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는 아무 쓰임이 없다.

성과에 따른 대우? 기회도 똑같이 주지 않으면서

어찌됐건 현재 부서의 기획업무 결정 권한과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래서 일이 많아지거나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그녀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재촉하게 된다. 그녀가 퇴근하면, 그때부터 물론 그녀의 일은 내 몫이 되지만 나의 절반 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그녀에게 8시간 이상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거니와 강제할 수도 없다.

회사에서 정규직 사원에게는 그에 맞는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내가 야근을 하지 않는 것은 실상 어려운 일이다. 거의 매일 야근을 하지만, 야근수당을 매일 청구하기엔 눈치가 보인다. 사측에선 은근히 파견직들에게 야근을 분담시켜도 좋을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당연히 파견직 어느 누구도 정해진 이상의 일을 달갑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야근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져 두달 내내 생리를 하기도 해,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그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찌든 내 표정을 보고 마음에 걸려 내게 선물을 줬던 것 같다. 왜 이렇게 서로 미안해 하는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미안할 일이 없으면 될 일인데 말이다.

만일 그녀에게 회사에서 제공하는 연수와 훈련기회가 있다면, 아마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정규직인 나는 회사의 연수와 훈련을 자주 받고 있는데, 그녀에겐 이런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성과를 많이 올려 몇 년 후에 정규직 전환이 된 상사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회사는 자주 기업의 윤리적, 사회적 책임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능력과 성과에 따라 대우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회도 똑같이 주지 않으면서 성과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태도는 공정한 노동환경을 만들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를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기획업무에 대한 연수와 훈련을 해서 그녀와 내가 업무를 분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서로 미안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도, 나의 격무도 없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계속되는 야근이 부담스럽고 힘겨워졌다. 사실, 너무 여유가 없을 땐 파견직 사원의 정규직 전환이어도 좋고, 새 정규직 고용이어도 좋으니, 나의 일과 책임을 나눌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누구라도 있었으면 싶다. 한 기획이 끝날 때마다 보람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노동환경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확신이 안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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