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연.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3년 전 미술대학의 실기실에서였다. 내겐 짧고도 강렬한 시간이었기에, 작고 소소한 기억들일지도 모를 그때의 일상이 지금은 나름의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 그를 작가와 기자로서 다시 만났다. 오랜 시간적 간격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했고 우리는 성숙했을 것이다. 2005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독일에서 귀국한 그는 특유의 괴짜다운 면모답게 인터넷 사이트의 친구 찾기 기능을 이용해 오랫동안 소식이 멀어졌던 동기들을 자신의 전시회로 불러모았다. 나도 몇 번의 전시회를 관람했고 그 때, 짧지만 인상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그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인상적인 말은 어떤 미술잡지에 실린 대학졸업생들의 인터뷰에 대한 언급이었다.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온 작품을 하는 학생들을 보면, 아 이 사람은 좀 오래 살아남겠구나 싶죠. 근데 거창한 주제, 거창한 얘기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그 작업활동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그 말은 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들린 그의 예술세계였던 것 같다. 하나의 전환점이 된 '빨간 실' 프로젝트 졸업 후 그는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고 학업을 계속해 나갔다. 독일은 ‘문화선진국’이니 국민들의 예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대단할 것이며 미술계는 한국과는 달리 살아 역동할거라는 기대를 한껏 가졌지만, 현실은 달랐다고 한다. "오프닝이 끝나면 갤러리나 미술관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건 우리나라나 독일이나 다를 게 없더라구요. 독일 출신인 현대미술의 아버지 요셉 보이스를 독일 일반인들은 모르더라니까요.” 그는 현대미술의 현실이란 우리나라나 유럽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이 예술인가를 두고 오랜 시간 방황하던 그가 자신의 예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작업을 하게 된다. 독일에서 마지막 해에 했던 '빨간 실'이 그것이다. "거의 손 씻을 각오로 빨간 실을 이었어요. 더 이상은 못하겠구나.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하고 그만하자 하고." 그렇게 그는 ‘빨간 실’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가 살던 집으로부터 그가 짝사랑했던 사람이 살다 2년전에 떠난 집까지 1.5km를 ‘빨간 실’로 연결하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현존하는데 대상은 부재한다. 나와 타인, 나와 세상, 현존과 부재를 연결하는 끈, 그 빨간 실을 더위와 배고픔 그리고 위험을 참아내며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대상에 도착한 후, 다시 그 실을 감아 돌아오는 길, 그가 이어놓은 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차에 쓸려 떨어져나가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누군가에 의해 뜯어져 있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어 붙이고 있는 그의 행위를 바라보기도 하는 등, 그의 세상으로의 끈은 생각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보존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빨간실 프로젝트는 많은 관람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깨달았어요. 거의 포기하다시피,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준비한 작업이 사람들에게서 반응을 얻어냈다는 것을요. 내가 절실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체면 차리지 않고 말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다가가진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그곳에 예술이 존재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트럭을 타고 독일과 폴란드의 6개 도시를 여행하며 졸업 전시를 하게 된다. 후에 MSK7이라는 그룹이 형성된 것도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서독 출신 동기생 3명과 동독 출신 3명, 그리고 그, 이렇게 7명으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순수하게 프로젝트 자체에 스스로 지원하고 참여함으로써 구성되었다. 그렇게 트럭에 각자의 작업을 싣고 거리로 나가 전시를 한 경험은 그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첫걸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MSK7의 트럭 프로젝트가 그렇게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트럭을 몰며 한 작업은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이것 역시도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더라구요. 자유롭게 진행되는 거리에서의 전시는 사람들과 역시 만나기 힘들었어요. 사람들은 약속되고 예약된 장소에서만 만날 수 있었어요. 그 외에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래서 다시 깨달았죠. 아, 안이냐, 밖이냐의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거리로 나간다고 해서 예술이 쉽게 소통되고 갤러리에 있다고 소통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한 것이로구나." 그는 굳어있는 갤러리와 화랑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지만 그곳에는 그 다음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한 미술관 관장이 '나병환자'의 생생한 삶에서 나온 물건들을 전시한걸 봤는데 그 작품을 보고 감동이란 걸 느꼈어요. 감동이란 단어가 현대미술을 말하기엔 구태의연해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갤러리와 미술관이 엘리트주의와 상업성 때문에 일반인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예술가가 참으로 진실된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게 그는 실제 경험을 통해 예술의 의미에 점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독일과 한국, 분단과 동서의 만남을 함축한 '핑퐁' 퍼포먼스
"이 그룹 중 3명이 구 동독출신이에요. 통독이 되면서 사람들의 다양한 적응방식을 볼 수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서구세계에 적응하고 진입하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적응하지 못하고 숨어드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 3명의 친구들은 모두 열심히 세상과 만나고 살아남으려는 친구들이었어요. 동독출신의 친구들로부터 분단세대들이 겪을 법한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들도 많이 들었어요. 일례로 한 친구가 우리나라 현대의 포니2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십 수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죠. 물어보니 통독이 된 후, 동독에 세계의 모든 중고차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그 차를 샀다고 하더라구요." 남과 북, 동과 서, 그리고 독일과 한국이라는 동서양국의 만남, 이 모든 것이 이 전시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휴전선 근처에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해서 직접 체험하게 됐어요. 허가를 받기 위해 군대에 공문을 띄운 후 왜 이 전시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또 받았어요. 30분을 설명하고 나면 다시 또 전화가 와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사회의 위계질서와 소통의 허술함에 대해서도 느끼게 됐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한반도의 휴전선처럼 개인이 어찌할 수 없어 보이는 사회 체계와 구조의 벽들을 허무는 일, 계급과 계층 그리고 분야 사이에 놓여있는 회색지대에서 재미있게 놀아보는 일, 그게 바로 예술이 하는 일이 아닐까요?" MSK7과는 지금까지 4개의 프로젝트를 함께 했고 앞으로도 매년 프로젝트를 구상할 것이라고 한다. 좋은 교육은 오랜 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것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것 같아요. 정답을 맞추려는 경향, 자신의 얘기를 하라는 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죠. 물질, 학벌, 외모 등 외적인 기준을 절대시하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훈련이 안 된 것 같아요." "저의 독일 지도교수님과 대화하면서 한국의 교육과는 참 다르다고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점을 하나 찍던 선을 하나를 긋던 그것이 제 폐부 깊숙한 곳에서 나온 것이면 한없는 지지를 보내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해야 해서 작업을 할 때는 귀신같이 알아내서 가차없는 비판을 하셨죠. 그 분이 진짜를 볼 수 있는 눈은 그 분만이 가진 유별난 것이 아니라 저의 교수님 또한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진짜’만이 사회에서 통한다는 신념=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어요.” 그가 진행한 수업들 중 한번은 충분한 '사랑'을 주겠다고 마음 먹고 임했더니 학생들과의 관계는 좋았으나 그에 대한 호감으로 자신과 비슷한 작업들만 쏟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고민을 한 후, 전시를 많이 보고 다른 분야도 많이 접하게 하면서 다작을 하게 했더니 작업은 아주 좋아졌지만 학생들과는 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화롭게 하고 있다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를 만나 처음 한 질문이 작업 전체를 흐르는 기본적인 주제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사람'이라고 했다. 잘 꾸며진 방에 머무는 예술이 아닌 살아있는 예술을 하고자 거리로 나온 그, 그곳 거리에서 실망하지 않고 다시 예술 본연의 의미를 깨닫게 된 원연. 그러기 위해 자기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야 했던 과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소통의 기회를 우리 모두에게 제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가 깨닫고 배워간 예술이라는 이름,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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