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중얼중얼하고 다녀요. 다른 일을 해도 머리 속엔 항상 이게 돌아가고 있어요.”
송철순(60)씨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그 중얼중얼하는 소리를 듣고서다. 음식점에서 누군가 판소리 한 대목을 작게 흥얼거리는데, 그 소리가 보통 ‘소리’가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게 꿈이었는데…
송철순씨의 고향인 고흥은 예로부터 유명한 소리꾼들을 배출해낸 곳이고, 소리판도 크게 열리는 곳이다. 그러나 정작 송씨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한다. “영화 한 편을 못 보고 시집왔어요. (고향마을이) 그렇게 완고한 곳이었어요. 우리 마을엔 남녀가 같이 있는 법이 없고, 연애 한다고 소문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덕석에 말아서 치고 그래요. 동네오빠가 어떤 여자랑 사귄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돌돌 말아서 때리는 걸 봤어요. 나는 남녀가 뭔지 그런 것도 모르고 시집을 간 거죠. 69년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애를 데려다가 키웠죠.” 송씨는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다고 했지만, 그의 끼는 이미 주위에서도 알아볼 정도였던 듯하다. “제가 이미자 노래를 잘 불렀어요. 남편이랑 모임에 갔다가 스탠드 바에서 노래를 부르면 남들이 넋 놓고 바라봤어요. 밤무대에서도 요구가 많이 들어왔죠. 근데 남편이 보내주나요, 안 되죠. 나는 마음에 소원이, 반짝이는 드레스 입고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거, 그게 꿈인데…. 남편이 핀잔을 주면 기가 눌려서.” 그 끼가 요즘 발현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선생님이 그러시죠. 끼가 많았기 때문에 이 나이에 소리를 배우게 된 거라고. 그 끼는 어딘가 모르게 숨어 있다가 나오나 보더라고요.” 하나씩 배워갈 때의 즐거움이란! 민요를 배우면서 시작된 소리와의 인연, 그는 주위의 권유로 박홍출 명창(78)에게서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하게 됐다. 소리를 배우게 되니 대중가요는 성에 차지를 않는다고. “소리가 어려우니까. 5~6분짜리를 하려고 해도 1년은 가지고 놀아야 해요. 뭔지 모르지만 아주 좋아요. 예전엔 심청가는 효, 춘향가는 사랑 이야기인줄만 알았는데, 사설이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는지 몰라요. 높낮이도 다양하고. 가요는 너무 싱거워.”
“청이 제일로 중요한데, 소리를 하려면 목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힘든 거 아니까 소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못한다 소리 안 해요. 다 격려해주고 박수 쳐주고 그러죠.” 암기력이 좋았던 송철순씨지만 예순이 다 되어,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소리를 배운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가보다. 악보가 없으니 가사에 12박을 넣고 “나만의 암호로” 표기를 해야 한다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고 혀도 돌아가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한 파트 주시면, 어떻게 또 외우고 머리에 집어넣누! 그래요. 하지만 하나씩 배워갈 때 즐거움이 커요.” 그 즐거움이 송철순씨 인생의 화두가 된 것 같다. 이제 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가정주부가 돈이 어디에 있겠어요. 수업료, 교통비에 이래저래 돈이 들어가니까 한 달에 20~25만원 정도, 근데 가정살림이 그럴 수 있나. 미쳤지, 내가 이 돈으로 적금을 들어 자식들을 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내 인생 너희가 아무도 몰라, 살아주지도 않아, 내 삶의 즐거움으로 살아가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소리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안숙선 소리크리닉에 가보았던 경험도 그에겐 큰 이정표가 되었다. “스튜디오라는 데를 처음 가보니 얼마나 떨리던지 몰라요. 안숙선씨가 나이가 아깝다고, 옛날 이화중선 명창 얘기도 하면서, 목이 너무 좋다고. 나이는 많아도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봄이 왔으니 산에 가서 연습해야죠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연습을 못 해요. 내 남편이 남도사람이라서 소리를 이해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북사람이라 그런 거 몰라요. 자식들도 다 남편 닮고 나 닮은 아이가 없어요. 나처럼 감정표현 많고 남 못 되는 거 못 보고, 그런 성격인 애가 없어요. 나는 식구들이랑 소리 얘길 못하니 슬퍼요.” 안타까워라, 왜 아내와 엄마의 남다른 재능을 몰라줄까. 송철순씨는 대회에 몇 번 나가 상을 받았지만 꽃다발도 한 번 못 받아봤다면서 푸념을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왠지 슬프다기보다는 귀엽고 애틋해 보였다. “나는 막내로 자라서, 지금도 아이처럼 응석부리고 싶은데~ 응석 부릴 식구들이 없어요. 그게 제일로 슬퍼요.” 봄이 왔으니, 이제 그는 산에 가서 소리연습을 할 것이다. 겨우내 애써 배운 소리를 봄에 산에 가서 목청껏 연습하며 익히나 보다. 그가 소리를 하면 등산객들이 ‘얼씨구~’ 하고 장단을 맞추기도 한다. 송철순씨는 마을 주민회관에서 남도민요를 가르치고 있다. 남도민요는 “삽으로 파서 흙을 푹 던지는 소리”, 묵직하면서 애절한 소리다. 초보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일은 “처음엔 늘어지게 가다가, 다듬어서 산을 만들고, 그런 다음 높은 산과 낮은 산을 만들어야 하는” 과정이다. “한 시간 하고 나면 목이…” 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지금이) 마흔이면 집안일이든 모든 일 다 제쳐놓고 소리만” 하고 싶다는 송철순씨. 모든 일 다 제쳐놓고 소리인생을 살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소리를 배우고 한편으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소리를 배우라고 권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질도 상당한 것 같다. “끼를 분출하게 되니까, 위장병도 나아버렸어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안과에도 자주 다녔었는데, 병원에선 화가 차서 그런 거라고, 그게 화병이래요. 내가 그렇게 불편하게 산 건 아닌데, 아무래도 그런 게 있었나 봐요. 이거(소리) 하고서부턴 안과에 한 번도 안 갔어요. 화가 소리로 다 나와버렸나 봐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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