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버드>(Black Bird, 데이비드 해로우어 작)는 2006 올리비에 희곡상 베스트 희곡상을 수상한 작품답게 논쟁적이면서 날카롭고, 반전을 통한 충격까지 갖고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12살 때, 40살의 이웃집 남자 ‘레이’와 성관계를 가졌던 ‘우나’는 15년이 지난 후 잡지 한쪽 구석 페이지에 실린 광고사진에서 레이를 발견하고 그를 찾아간다. 레이는 15년 전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짐으로 인해 재판을 받고 6년간 복역 후 출소해서 이름과 직장을 바꾼 채 살아가고 있다. 장소는 레이가 근무하는 회사의 휴게실. 그 휴게실 안에서 두 사람은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를 하면서 과거의 상처를 조우한다. 무엇이었을까. 12살의 어린 여자와 40살의 남자 간에 있었던 감정의 소통은 무어라 이름 붙여야만 하는 것일까. 마음을 열지 않는, 결코 다 보여주지 않는
성냥불이 타올랐다 꺼지는 시간만큼 짧은 찰나가 지나고 나면 사회적으로 파멸하여 과거를 숨기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발버둥치는 중년의 남자와, 직장과 자기 집을 갖고 남자들과 연애를 즐기며 나름대로의 싱글 라이프를 살고 있지만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20대 중반의 독신여성이 남는다. 이미 멀어져 버린 과거의 시간들. 이들의 사랑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이들이 과거의 생채기를 극복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 토해내는 과거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부디 이들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손을 잡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사회적 시선이 문제가 될 나이가 아니니까. 우나는 성인여성으로 자랐고, 레이도 미혼인 이상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던 사회적 편견과 통념은 힘을 잃게 될 것이었다. 다시 한번 이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막판에 레이가 실제로 로리타 콤플렉스의 소아성욕을 가진 남성일지도 모른다는 혐의가 제시된다. 우나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한 소녀의 육체를 욕망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 폭로된다. 레이의 소아성욕은 ‘혐의’를 갖는 것이지 ‘증명’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어떤 식으로 레이를 이해해야 할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어떤 관객은 레이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표출했고, 어떤 관객은 ‘사람들이 모두 비뚤어진 시선으로만 레이를 본다’며 레이를 두둔했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는 지점에서 나 역시 길을 잃었다. 작가가 세심하게 계산해서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을 깔아놓았기에 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극이 진행될수록 우나는 점점 이해가 가는 인물이 되는데, 레이는 점점 알 수 없는 인물이 되어간다. 너 외에 어린 소녀와 그런 적 없어. 섹스한 적 없어!
우나의 감정이 이렇게 적극적이지만 않았어도 레이를 비난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12살의 소녀와 27살의 여성이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면, 과연 12살의 소녀의 감정을 치기 어린 충동으로 간단히 치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는 모르겠다. 세상의 어떤 사랑이 사리분별 혹은 지적 수준과 공존하던가. 어리고, 분별이 없을 나이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떤 의미로서는 성급한 일반화이다. 그에 반해 레이는 조금 더 위험한 경계선에 서있다. 레이의 일생을 통해 미성년자와 섹스를 한 적이 우나가 유일하다면 레이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이상의 케이스라면 그는 소아성애자로 이름 붙여지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레이가 소아성애자인가, 아닌가를 검열한다. 우나만이겠지? 그렇지? 걔 말고 딴 소녀들도 그런 건 아니지? 상호 동의 하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에서 사랑과 욕망, 사랑과 범죄를 구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실제로 이것들이 구분이 가능할 만큼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기는 한가. ‘사랑, 참 퍽퍽해진다’라고 되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제도와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설명되지 않는 욕망은 위험하다. 그것이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순간, 욕망은 말살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 된다. 제도 내의 안전한 사랑을 통속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제도 밖의 위험한 사랑은 성적 욕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어느 순간, 그 누군가가 위험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성적 폭력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보수적이 되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협한 시선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단죄할까봐 마음 졸이는 소심함이라니. 사랑이란 이름의 면죄와 구원
이 부분에서 험버트의 도착적인 소아성애는 사랑으로 승화된다. 독자들은 험버트를 변태로 볼 것인가, 아닌가를 한번 더 고민하게 된다. 물론 소설 전체를 통해서 험버트가 너무나도 많은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이미 그는 문제가 있는 범죄자이긴 하다. 단순히 어린 여자에게 끌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협박하고, 약을 먹여 성관계를 가지려고 하고, 납치하여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롤리타가 동의하지 않은 강제성에 대해 뚜렷한 증거가 있기에 험버트의 행위는 범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리타를 순전히 섹스 파트너로만 취급하다가 버린 퀼티 같은 인물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을 부여 받는다. 험버트의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섭될 어떤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이름은 음험한 욕망의 면죄부이자 구원이다. 혹은 육체적 관계를 매개로 하는 사랑이란 본디 음험한 욕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고 육체적인 충동을 느낄 때, 그것을 사랑과 욕망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객관적으로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본다고 하더라도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순전히 자의적인 기준이며, 오히려 결과를 통해 소급되어 결정되는 마음이다. ‘A는 B와 결혼을 했으니까 B와의 육체관계는 사랑해서 한 것이다’라는 식의 ‘책임’을 통해 역추적하여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성의 상호동의가 결합되면 더욱 문제는 복잡해진다. ‘롤리타’와 다르게 ‘우나’는 상대 남성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고 있다. 롤리타는 끊임없이 험버트에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우나는 레이를 기다린다. 도망가려는 롤리타를 막는 험버트에게 분노를 느끼지만, 우나가 원하는데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 레이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낀다.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서라도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적극적인 여성을 보며, 나는 그녀의 감정을 ‘미성년자’라는 틀에 묶어도 되는 것인가를 회의하게 된다. 동시에 그 틀을 벗어나서 우나를 보았을 때, 레이라는 남성이 완벽하게 무죄가 되어버리는 위험 역시 느낀다. 법과 제도 앞에서 사랑과 욕망은 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복잡해지는 모양이다.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들이 충돌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블랙버드>는 충분히 문제적인 연극이다. 특히 지인들과 함께 갑론을박 의견 교환을 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어차피 정답은 없는 것이고, 사람마다 자신의 체험과 가치관에 따라 첨예하게 갈릴 부분이다. 그 논쟁의 한복판에 참여하고, 마음속의 여러 생각들을 충돌시키고 싶은 관객이라면 공연장을 찾아가길 권한다. ◎ 블랙버드(Black Bird) 공연 안내 연출: 이영석 출연: 최정우, 추상미, 레지나 공연기간: 2008년 3월 21일(금)~5월 25일(일) 공연시간: 평일 8시, 주말과 공휴일 3시, 6시, 월요일 쉼 공연장소: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료: 일반 35,000원/ 학생 25,000원 공연시간: 1시간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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