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곽숙희(46)씨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티모르에서 국제지원활동을 하던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의 일이다. 모기에 물려 댕기열(Dengue Hemorrhagic Fever)에 감염됐는데 치명적인 열병이었다. 거기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소생의 가능성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먼 길을 가야 한다며, 숙희씨를 안내한 것은 다름아닌 저승사자였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 그것도 동양인 저승사자와 서양인 저승사자가 함께였다. “시베리아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중국까지 왔다가 잠시 멈추었을 때 눈을 떴어요.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고, 임종을 앞둔 환자를 지켜주는 간호사가 옆에 있었죠. 창 밖으로 저승사자 둘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내가 소리를 질렀더니, 간호사가 거기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보니, 그 자리엔 사람이 서 있을 공간이 없더라고요.” 시베리아까지 갔으면 죽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숙희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저승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국인들에겐 공통적인 원형 같은 게 있는 것 같다면서. 나이 마흔에 싱글맘이 되다
“의사에게 다시 동티모르에 가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했어요. 당신은 이미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요.” 이 시기를 정점으로 그의 삶은 큰 획을 그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스친 이미지들, 의식이 붙어있던 짧은 순간에 떠오른 생각들이 이후의 삶을 변화하게 만든 것 같다고 한다. 독일에서 유학하며 서양철학을 전공한 숙희씨는 “합리성과 논리에 감동 받았던 시절도 있지만, 삶은 논리와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의 운이나 사주, 풀어야 할 업보에 대해서 믿는 편이다. 그리고 점차 불교적인 가치관에 가까워지고 있다. 어떠한 인연 혹은 업보 때문인지, 숙희씨는 그곳에서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인도인이었고 열세 살 연하의 젊은 남성이었다. 오, 열세 살이나? 하고 나이를 헤아려보는 사이에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선 몇 살 연하냐 연상이냐 말이 많지만, 외국에선 연애하는데 나이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잖아요” 라고. 그는 “(남자가) 다가오길래 거절하지 않았고”, “아이를 갖고 싶어서 임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의 아빠는 결혼도, 양육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정했다. 아마 숙희씨는 자신이 싱글맘이 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 자체가 “20대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고 하니까. 그런 사람이 왜 마흔이 되어서 아이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확실치 않다. 중요한 건 그 선택으로 인해 행복감을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힘든 면도 있지만. “아이를 안으면 마음의 위로를 받아요. 내가 아이를 안아준다기보다 아이가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 같아요.” 아이 몫까지 내가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 시원시원한 말투 때문인지, 곽숙희씨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척척 잘 풀려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흥미진진하게 재미도 있고. 하지만 여전히 혼인이 인간의 도리처럼 여겨지고 ‘단일민족국가’의 환영을 아직 못 벗어난 한국사회에서, 결혼하지 않고 엄마가 된 곽숙희씨와 외국인남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표준이 아니다.’ 우리사회가 표준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 생각해볼 때, 불편한 일들이 많을 수 있겠구나 하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숙희씨는 미리부터 걱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이 몫까지 대신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당면한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는 쪽이다. 아이 양육의 과제는 국가가 해결해주는 게 없어,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보다 더욱 심적으로 어려웠던 과제는 아이와 생물학적 아빠와의 관계였다. 숙희씨는 아이의 친권과 양육권을 홀로 가진 싱글맘이지만, 아이와 아빠가 국경을 넘어 가끔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차례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갈등도 컸으리라. “나와 그 남자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아이와 아빠와의 관계도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 마음만 따진다면 아이가 아빠와 관계없이 산다면 편하겠지만, 아이의 몫까지 내가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양한 생각이 인정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고 노력 중이라면서, 그는 “기질인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외국에 다니는 것이 아무래도 기질인가 보다. 그의 말대로 범띠라서, 외국 중에서도 험한 곳들만 가게 되는 건지도. 하지만 그러한 결단을 하게 된 큰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열심히 하면 인정 받고, 못하면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줄 알아야 하는데, 한국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노력하는 사람은 바보 같은 사람이죠. 대충하는 것이 현명한 거고, 계산적이어야 하는 거고.” 더욱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제도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좁은 시선은, 숙희씨처럼 격의 없고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에겐 굴레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가족은 ‘진한’ 혈연이 아니라, 각자의 공간이 있고 서로 책임감 있게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했다. 그리고 “다양한 생각이 인정 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여기선)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거든요. 그저 나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존중 받을 수 있길 바래요.” ※이 기사는 신문발전위원회 2008년 소외계층 매체운영 지원사업의 보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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